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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Sep 24. 2021

편집의 여왕

누구에게나 버리지 못하는 물건이 있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고 살아간다. 기억과 감정도 편집할 수 있다면, 깊게 상처받아 문신처럼 남아버린 그 모든 흔적들을 흉하지 않은 모습으로 편집하고 저장하는 성공적인 편집의 여왕이 되고 싶다. 


성공적인 기억과 감정의 편집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쁜 기억이 무엇인지, 내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나쁜 기억을 유익한 기억으로 전환 편집하여 저장할 수 있는 시작점이 되어준다. 


1.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 발생한 일이지만 문뜩 떠오를 때마다 어제 일어난 일처럼 화를 부른다면 그 흉악한 기억들을 불러들여 요약 한 뒤 나열해보자. 그때의 기억과 감정의 흐름을 읽고 중요한 핵심에 밑줄을 긋는다. 


2.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을 분류한다.


3. 긍정적인 감정들을 새하얀 종이 위에다 뺵뺵이 하듯이 머릿속에 반복해서 주입한다.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까지 먹어 삼키지 않도록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의 균형을 맞추어 재구성한다.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들은 최소화하여 요약 저장한다. 지나간 일에 대한 분노나 슬픔의 늪에서 아직도 허우적거린다면 축소 편집을 툴을 사용하여 하루빨리 자유로워지는 것이 좋다. 반복적인 주입식 편집 연습도 효과적이다. 하지만 급행 속도의 지우기 Delete 툴은 추천하지 않는다. 


잊고 싶었던 아빠에 대해 내가 사용했던 아픈 기억을 송두리째 지워버렸던 Delete 지우기 방법은 꽤 잘못된 편집 방법이었다. 그 이후 나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난처한 상황에 닥치면, 매번 상황을 회피하고 지워버리는 지우기 Delete 편집 기능의 전문가가 되어버렸다.  


나의 기억 시스템에서 Delete 되었다가 내가 낳은 아이가 휴지통 칸에서 꺼내서 복원시켜준 어릴 적 기억. 그 기억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주었고, 그제야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문가에게 승인받은 적도 없는 나만의 기억과 감정 편집 훈련으로 어렵게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살다 보면 피하고 도망쳐야 하는 것이 맞는 일도 있지만, 맞서서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하는 일들도 있다. 강둑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손가락으로 잠시 막고 있다가, 한순간에 무너지는 둑과 강물에 휘말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파멸의 삶을 원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늘이 없는 사람은 없다. 슬픔이 없는 사람도 없다. 우리 모두에겐 언젠가 삶을 송두리째 집어삼킬 것 같은 그늘과 슬픔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 끝이 없을 것만 같은 어두운 터널을 다 지나고 나면 우리는 조금 다른 사람이 된다. 인간이란  어떤 일이든 지나온 일들을 통해서 학습을 하고 결국은 뭔가를 배우는 존재이다.


행복한 감정을 어떻게 편집 저장하느냐 만큼, 슬프고 우울한 감정과 나쁜 기억을 편집하는 능력에 따라 삶은 확연하게 달라질 수 있다. 좋았던 순간, 행복한 마음, 잘못된 것, 불편했던 순간들을 적절히 편집하여 꽤 살만한 인생으로 출력하는 것이, 컴퓨터를 켜고 윈도를 열어 문서를 작성하는 것처럼 간편했으면 좋겠다.


내 영혼을 갉아먹던 유익하지 않은 감정들을 손가락 몇 개로 재빠르게 단축키를 사용하여 편집할 수 있다면... 자동 입력기의 도움이나 자동 맞춤법과 띄어쓰기 기능처럼 클릭만 하면 알아서 척척 처리해주는 특별한 인생 편집 버튼이 존재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Delete

편집할 가치도 없는 기억들은 복원되지 않도록 지우기.


Skip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 순간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황들이 지워질 수 있다면 건너뛰기.


Copy

무언가를 깨닫거나 배울 수 있다면, 기쁨과 행복감 평온함 등 긍정적인 감정이 가득하다면, 좋은 감정과 기억, 롤모델처럼 내게 동기부여를 주는 것들의 리스트가 존재한다면 무한 복사하기.


Paste

위에 복사한 것들을 일상에 가득 갖다 붙이기.


편집 툴을 자유자재로 이용할 수 있는 편집의 기술은 각자 개인의 시간과 경험에 의해 단련된다. 이런 모든 편집 툴 사용에 능수능란하다면 내 삶은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더불어 효과음과 배경음악, 자막과 내레이션까지 편집 전문가처럼 아무런 망설임 없이 최상의 결과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어쩌면 나는 유익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쿨한 언니 세계 제패를 이룰 수 있을 것만 같다. 

 



꽤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물건들을 수집하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던 때가 있었다. 여행의 추억이 담긴 물건, 소중한 사람의 마음과 기억이 담긴 물건들, 백만 가지 이유를 가진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을 곁에 두고 수집하다가 수집한 물건들에게 내 공간을 빼앗겨버렸다. 그래서 오랫동안 수집하던 물건과 추억과 애정을 가득 품은 물건들을 큰 맘을 먹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집을 하지 않아도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온갖 물건들이 걷잡을 수 없이 집 안에 다시 가득 쌓여간다는 것을 말이다.


우리 집 주방 한 켠에는 자주 사용하지만 또 자주 사용하지 않는 잡동사니가 가득한 작은 바구니 하나가 있다. 날을 잡아 정리를 해서 비워내도 어느 순간 어디서 온지도 모를 물건들로 가득 채워진다.


마치 마르지 않는 샘 같다.


그곳에 항상 가득 차 있는 사지도 않고 사용하지도 않는 볼펜과 펜들은 항상 나의 심기를 건드린다. 멀쩡하게 잘 나오는 볼펜들을 자리를 많이 차지하지 않으니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냥 두곤 했는데, DNA 따위는 가지고 있지도 않은 볼펜들이 세계의 불가사의 리스트에 오를만한 믿을 수 없는 종족 번식의 능력으로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무더기가 되어버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만 가는 물건과의 기싸움은 감정과 기억의 편집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다.  

 

큰 맘을 먹고 물건 정리를 시작한 지가 몇 해가 훌쩍 넘었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버리지 못하는 물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물건은 일 년에 한 번 사용할까 말까 하는 재봉틀이다. 1999년 의상학과에 입학하게 된 내게 아빠가 사주신 재봉틀. 그 해 이후로 지금까지 그를 만난 적은 없지만 나는 그 재봉틀의 페달을 밟으며 꿈을 키웠다. 유년 시절 슬픔의 결정체인 인물인 그와 나의 꿈이 교집합으로 결집되어 있는 오묘한 물건인 재봉틀.


끊임없는 노력과 경험을 통해 감정 편집하는 데에 꽤 익숙해졌는데도 그에 대한 기억은 복원되지 않도록 완벽히 지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에 대한 기억과 공존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언젠가부터 못된 나라 대마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던 그를 생각해도 더 이상 아프지 않다. 그를 떠오르게 하는 재봉틀을 마주하는 것도 제법 편해졌다.


시행착오 투성이었던 나의 편집 능력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서 신장된 것인가? 나에게도 누르기만 하면 모든지 다 정리되는 편집 버튼이 장착된 것인가? 마음속으로 잘난 척을 해보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어쩌면 최고의 편집의 기능인 시간이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야 겨우 내 슬픔을 몽땅 흡수한 물건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아빠가 건강히 잘 살고 계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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