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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Sep 27. 2021

나는 엄마처럼 안 살아.

내가 엄마였고 엄마가 나였다.

엄마랑 나는 전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외할머니에게 평생 문딩이 같은 놈이었던 아빠만 빼닮은 외모 때문에 나는 어릴 적부터 외할머니에게 눈흘김을 받고 자랐다. 외할머니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던 문딩이 같은 놈인 아빠랑 결혼하기 위해, 엄마는 보따리를 싸서 밤기차에 몸을 실었다.  

외할머니와 엄마의 푸닥거리가 시작될 때마다 꼭 빠지지 않고 등장했던, 돌아가신 외할머니에겐 보따리를 싸서 도망갔던 딸년이었던 엄마.

오빠가 78년생이고 내가 80년 생이니까 엄마가 보따리를 쌌던 시기는 아마도 1976년이나 1977년쯤이 될 것 같다. 그때쯤이면 근사한 슈트케이스를 들고 여행을 하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가방이라는 물체를 들고 여행 다니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절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가방에 짐을 싼 것이지 정말 보따리를 싸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어릴 적부터 내내 생각해왔다. 하지만 엄마가 보따리를 싸야만 할머니표 푸닥거리 시나리오가 완성되기 때문에 할머니 앞에서 가방과 보따리에 관한 내 생각을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은 없다.


엄마가 그 대단한 며느리들도 벌벌 떨게 하던 초강력 카리스마를 가진 외할머니에게  "난 엄마처럼 안 살아" 란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자주 아빠랑 결혼하기 위해 엄마가 보따리를 싼 것이 떠올라 화가 치밀 때마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엄마에게


 "너도 너랑 똑같은  낳아봐." 저주를 퍼부었다.


나는 엄마처럼 남자 때문에 야반도주를 하기 위해 보따리를 싸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삶을 위해 슈트케이스에 짐을 싸서 집을 떠났다. 머나먼 타국에서 외국인 남편과 살며 일 년에 한 번 엄마를 만날까 말까 하며 살았다. 팬데믹 시대가 시작된 이후로는 벌써 2년 반이 넘도록 엄마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니, 어쩌면 엄마를 향한 할머니표 저주가 제대로 발휘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온 가족의 노예처럼 살던 엄마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엄마 왜 그때 보따리 쌌어?! 난 엄마처럼 안 살아."  

"그래... 너는 나처럼 살지 마."


내 유년시절과 성장기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람은 온 가족을 학대하던 아빠인 줄로만 알고 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내게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찾아올 때마다 엄마와는 다른 선택을 하며 전혀 엄마처럼 살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나의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면 볼수록, 나는 뼛속까지 엄마를 쏙 빼닮아있다.  


엄마는 자주 아빠에게 사람 같지 않은 대접을 받고도 모자라 왜 맞는지 이유도 모른 채 두들겨 맞았다. 그럴때마다 자주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울다가 잠들었다. 그리고 새벽같이 일어나서 어제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아빠를 살뜰하게 챙겼다.


나는 상대가 이성이던 동성이던 나를 함부로 대하고 할퀴는 사람에게 성을 내기는커녕 쩔쩔맸다. 구차하게 매달리는 것도 모자라, 그 곁을 지겹도록 서성거리는 불평등한 관계가 당연한 줄 알고 살았다.


그런 내가 바로 엄마였고 엄마가 바로 나였다.


내게 엄마처럼 살지 않기는  쉽지 않았다.

 

나와 똑같은 엄마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하고, 대체 왜 나는 그런 가시 돋친 말들로 상처만 주었는지 후회가 된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 

"그래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 근데 너도 너랑 똑같은 딸 낳아서 키워봐."

외할머니에게서 엄마로 그리고 내게 대물림되는 딸과 엄마와 대화. 나와 똑같은 딸이 자라서 내가 엄마에게 한 이야기들을 다시 내게 한다면...내가 던진 말들로 엄마가 받은  상처의 조각들이 부메랑이 되어 내게 돌아온다면...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만 같다.


정말로 다행이다.

  아들만 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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