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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드니우주인 Oct 18. 2022

세신의 힘

이태리타월이 나를 살렸네

어릴 적 외갓집은 목욕탕을 했다. 그래서일까? 목욕탕집 딸이었던 엄마는 목욕탕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엄마와 별 공통점이 없는 나는 목욕탕에 가는 것을 굉장히 싫어한다. 숨 막히는 한증막과 찜질방은 물론 모르는 사람이 나의 벗은 몸을 구석구석 마사지하고 초록색 이태리타월을 이용하여 나의 피부와의 마찰로 때를 생성시키는 때밀이 서비스는 질색한다.


“그렇게 잠 못 자고 피곤하고 애들 때문에 신경 쓰면 목욕탕에 가서 몸을 싹 풀어야 해. 때도 밀고 말이야. “


땡전 한 푼 없이 엄마 아니 영림 씨의 집에 아들 둘과 얹혀 지내고 있고, 한국에 살지 않기 때문에 효녀가 되기로 한 나는 영림 씨의 등쌀에 밀려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본인의 목욕탕 체험기가 딸의 체험기와 통하길 원하는 영림 씨는 나를 목욕탕에 보내기 위해서 베이비 시팅은 물론 아이들 픽업 서비스를 해주는 선심도 쓴다. 내가 목욕탕에 마지막에 온 지는 10년도 훨씬 전 같다. 기억이 가물거린다. 그렇다. 마지막 목욕탕 방문은 연애시절 외국인 남편에게 한국의 관광명소인 찜질방 체험을 선물하기 위해서였다. 찜질방을 생각하니 갑작스럽게 찜질방 먹거리가 먹고 싶다. 뜨끈뜨끈한 찜질방 안에서 나오자마자 갈증을 식혀주는 얼음이 동동 떠있는 식혜 한 모금과 황톳빛의 누르스름한 달걀의 기똥찬 조화가 떠오른다. 믿을 수 없다. 찜질방에서 먹여야 꿀맛이 나는 식혜와 맥반석 계란을 먹어본지가 10년이 넘었다니... 일상의 달달한 기쁨을 주던 그 맛을 너무 오래 잊고 지냈다. 기쁨의 맛을 보기 위해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찜질방을 검색한다. 하지만 코로나의 여파로 인하여 대부분의 찜질방은 운영하고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불가마와 목욕탕 욕탕 속에서 활개를 쳐야 에너지를 받는 영림 씨가 자주 다니는 24시간 여성전용 목욕탕에 오게 되었다.


'요새 세상에도 이런 목욕탕이 있다니'


영림 씨의 단골 목욕탕은 90년대 목욕탕 배경의 영화 세트장 같다. 갑자기 긴장된다. 방광에 장착된 오줌보가 발동한다. 입장하자마자 바로 화장실을 찾는다. 화장실 표시가 있는 반투명 유리의 문을 열자 XX목욕탕이라고 적혀있는 핑크색 플라스틱 슬리퍼가 눈에 보인다. 타임머신에 올라탄 것인가? 어릴 적에 대중목욕탕 화장실에서 본 쌍둥이 슬리퍼가 나를 반긴다. 피식 웃고 말았다. 심지어 추억 속의 외갓집 대중목욕탕 화장실에서 맡았던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나도 모르게 오랜 버릇인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이런 순수한 대중목욕탕 기능만 있는 곳에 방문 한 것은 20년도 훨씬 전인 것 같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여자의 벗은 모습들이 보인다. 너무 부끄러워서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대략 난감하다. 영림 씨의 단골 대중목욕탕 평일 낮 시간 때의 방문객은 주로 노년층이다. 주름이 가득하고 중력에게 저항하지 못한채 바닥으로 향하고 있는 노인들의 늘어진 살들을 눈앞에서 보니, 이제 막 비슷한 살들의 늘어짐을 시작한 나의 몸뚱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노인들 사이에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안 젊지만 젊은 몸뚱이를 가지게 된 나를 힐큼거리는 노인 여자 사람들의 눈총이 꽤 뜨겁다. 나도 모르게 복근에 힘을 주어 본다. 복근에 힘을 줄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0초지만 잠시라도 두리둥실하던 배가 쏙 들어간다.  


“세신 하시나요?”


카운터 여사님이 물으신다.


“세신이 무엇인가요?


알 수 없는 달나라에서 온 신조어를 되묻는다.


“때 미시냐고요?”


잠시 고민했다. 여기는 영림 씨의 단골 목욕탕이다. 영림 씨에겐 내가 때를 밀었는지 안 밀었는지가 중요하다. 집요한 영림씨는 단골 세신사분께 분명히 확인할 테고, 내가 때를 밀지 않은 것이 밝혀지면


“이년아~~ 거기까지 가서 때를 안 밀고 와”


란 멘트를 듣고 등짝 스메싱을 선물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난 아이들 앞에서 영림 씨한테 욕먹고 한 대 맞아서 쪽팔릴 것이다. 벗은 몸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도 나의 때를 누군가가 밀어준다는 것도 내키지는 않다. 하지만 손자들 돌봄은 물론 픽업 서비스까지 제공했는데 자기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영림 씨의 가늠할 수 없는 짜증에 마음이 휘청이고 싶지 않아서 Yes를 말했다.


“30분 정도 기다리세요”


30! 목욕탕을 무척이나 좋아하지 않는 내게 목욕탕에서의 30분은   시간이다. 무엇을 할지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코로나 때문인지 아니면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없어서인지  수는 없지만 한증막은 운영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냉탕을 질색하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온탕만 여러  들락날락거렸지만 목욕탕에서의 30분은 도무지 흐르지가 않는다. 그렇다고 목욕탕에서 벌거벗은 노인 여자 사람들 사이에 앉아 무엇인가를  먹고 싶지도 않다. 90년대 대중목욕탕 영화 세트장에서 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불가마 체험에 도전해보기로 한다. 목욕탕에서 제공하는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푸대기를 깔고 온몸을 감싼채 불가마 안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속옷 차림으로 불이 이글거리는 불가마 속에 태연하게 앉아있는 초강력 피부 껍데기를 지닌 노인 여자 사람들에게 마음속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렇게 불가마 애송이는 불가마 속에 30초도 앉아있지 못하고 화상을 입을 뻔했다고 한다.


“준비되셨어요? ”


세신을 하시는 분이 플라스틱 침대 위에 따뜻한 물을 뿌린다. 그리고 양손에 초록색 이태리타월을 끼고 박수를 친다.


“누우세요.”


라고 말했지만 내겐 "넌 이제 내 손에 죽었어"라고 들렸다. 무서웠지만 누웠다. 눕자마자 참으로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아버렸다.


“엎드리셔야지요. 때 처음 미나 보네. 다리를 들어봐요. 아픈가요? 살살할까요? 옆으로 누워 보세요.”


‘처음 본 사람에게 내 몸을 다 보여주고 이렇게 누워있다니. 치욕이야. 치욕.’


세신사님이 자꾸만 내게 말을 시키는데 대답도 못할 정도로 부끄럽다. 몇 회 내게 말이 씹힌 세신사님은 대화를 포기하고 때를 미는 것에 더욱 전념한다.


'죄송합니다. 세신 서비스는 처음이라.. '


하지만 웬일? 어느 순간부터 나도 제대로   없는   구석구석을 온몸과 팔다리를 열어 세신사님께 죄다 보여주는 것이  이상 부끄럽지가 않다. 지쳐 버린  , 아무도 챙겨 주지 않는  마음이 세신사님 아니 취유의 손길에 의해 다시 따뜻해지고 살아난다. 나의 이민 생활과 지난날들이 슬라이드처럼 스쳐간다. 억울하던 , 슬펐던 , 화내는 것이 싫어서 애써 외면하고 혼자 삭히고 꾹꾹 눌러 담았던 온갖 못생긴 감정들이 취유의 손이 양손에  초록색 이태리타월이 몸에 닿자마자 때가 되어  몸에서 떨어진다. 취유의 손이 초록색 이태리타월을 벗고 나의 머리를 감겨 주었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곳도 빠짐없이 나를 아껴주는 신비의 . 나의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고 위해 주는 것은 아이들도 친정 엄마도 아닌 그녀! 치유의 손이었다. 마침내 나는 초록색의 치유의 손을 가지신 여신님의  손을  잡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영림 씨가 나에게  때를 밀라고, 아니 세신을 하라고 강요했는지 알겠다. 영림 씨는 황혼 육아의 슬픔과 위기를 “세신으로 넘길  있었던 것이 아닐까?


영림 씨의 말처럼 목욕탕에서 세신을 받고 몸을 풀었더니 항상 묵직하던 천근 같이 무거웠던 어깨가 편안하다. 그날 밤 오랜만에 단 잠을 잤다. 그리고 나는 연어가 되어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를 거슬러 헤엄쳐서 나의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꿈을 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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