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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무도 가지 않은 길 Jul 03. 2022

두 얼굴의 해

연재소설

  6월 마지막 날밤 10시경. 근로자들을 태운 비행기가 사우디아라비아 다란 공항에 도착했다. 열사의 나라! 밖은 폭염으로 들끓고 있을 터. 근로자들은 숨을 죽이고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디뎠다. 

  근데 이게 웬일? 근로자들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숨이 헉헉 막힌다던 찜통더위는 이름값을 못 했다. 한국의 초여름 날씨 정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뭐 이래. 겨우 이거야?'

  하며 그들은 한시름 덜었다고 안도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버스로 마중 나온 총무부 임 대리가 인원 파악을 끝내고 나서 말했다. 

  "여러분은 밤에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사막은 해가 지면 금세 식어 버리죠. 낮이라면 머리도 들지 못할 텐데 말입니다." 


  근로자들은 두 대의 버스에 나뉘어 타고 사우디의 밤길을 달렸다. 공항을 벗어난 버스는 다란 시내와 담맘 외곽을 거쳐 1시간 정도 지나자 이내 사막 도로로 들어섰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 달빛에 비친 모래밭은 한 점 푸른 생명도 없이 벌거벗은 채 내팽개쳐져 있었다. 수천 년, 수만 년을 그렇게 버려진 땅. 이제 그들이 살아갈 터전이 될 곳이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난생처음 남의 나라 땅에 발을 내디딘 근로자들. 기내에서는 스튜어디스를 희롱하며 짓궂게 굴던 망나니들이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묵묵히 말이 없었다. 

  그들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을까? 고국에서의 갖가지 일들―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고 즐거웠던 순간들, 환희와 기쁨으로 가슴 벅찼던 일들, 사랑하고 때로는 미워했던 일 등― 그 모든 일상들을 뒤로하고, 이제 그들은 불볕더위 속에서 밤낮없이 일할 각오를 다지며,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모를 인내의 터널로 들어서는 비장함, 하지만 그 인내의 끝에 기다리고 있을 새롭게 펼쳐질 미래에 대한 기대,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이 어우러져 만감이 교차하리라. 


  버스는 황소처럼 달린 끝에 사막 한가운데 자리 잡은 캠프에 도착해 근로자들을 토해놨다. 그들은 담맘 현장 2진으로 기능별로 분류돼 A부터 K동까지의 빈자리를 채웠는데, 필성은 몇 명의 다른 잡부들과 K동에 입소했다. 한 동에 40명씩 수용됐고, 개인별로 매트리스와 홑이불 한 장, 두 칸짜리 수납장, 선반 하나가 배정됐다. 짐 정리에 30분이 주어지고 첫 작업에 대비해 곧바로 취침에 들어갔다.    



  

  다음 날 새벽. 필성은 아라비아 사막의 해와 첫 대면을 할 생각으로 숙소 밖 사막으로 나섰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는 모래알을 뿌려놓은 듯 무수한 별들이 반짝였고, 새벽 어스름이 깔려있는 모래밭은 6년 전 인류 최초의 달 착륙선이 보여줬던 달 표면처럼 낯설고 황량했다. 필성이 우주인 암스트롱처럼 그 위에 우뚝 섰다.      


  지평선 아래서 해가 어둠을 거둬내기 시작했다. 링에 먼저 올라 상대방을 맞는 복서처럼 그는 동쪽 하늘을 노려봤다. 고국에서는 생명의 원천이지만, 이곳에서는 악마 같은 해가 정체를 드러내리라.  

  이윽고 녀석이 꼭지를 내밀었다.―‘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정반대의 얼굴을 한 이중인격자다.’

  어깨를 올려놓았다.―‘지킬 박사로의 변신법을 잊어버린 악마 하이드다.’

  몸통이 빠져나왔다.―‘좋으나 싫으나 저놈과 하루하루를 함께 해야 한다.’

  마침내 꼬리까지, 이글거리는 자태를 완전히 드러냈다. 

  순식간에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건 서슬 퍼런 불덩이뿐! 천지가 숨을 죽였다. 필성은 난생처음 해를 보는 듯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이게 무슨 꼴이람. 이제 간을 봤을 뿐인데. 그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나서 해를 향해 외쳤다.  

  "너, 사막의 폭군이여! 네놈은 한시도 나를 놔주지 않을 것이다. 삽질할 때도, 망치질할 때도, 시멘트 반죽할 때도, 자재를 나를 때도, 숨 막히게 따라다니며, 내 인내심을 시험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결코 내 의지를 꺾지는 못하리라."      




  입소식이 있었다. 염 부장의 간단한 환영 인사 후 임 대리가 근로자 준수 사항을 설명했다. 어디 가나 뻔한 내용이지만, 한 가지는 건성 들어 넘길 사항이 아니었다. 임대리는 군기를 잡으려는 듯 

 ‘시말서를 쓴 사람이 재차 규정을 위반하면 강제귀국에 처 해지고 귀국 비행기 요금은 본인 부담’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안내 사항 전달이 끝나자 임 대리는 ‘아침 식사를 끝내고 40분 내에 통근 버스에 탑승.’을 복창시키고 근로자들을 식당으로 인솔했다.


  필성이 그 뒤를 따라 몇 발짝을 떼었을 때 눈이 번쩍했다. 두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는 사람. 그는 다름 아닌 강 무길 아닌가! 형제나 다름없는 불알친구,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나를 맞아주다니··· 필성의 코끝이 시큰했다. 무길의 얼굴도 붉게 상기돼 있었다. 둘은 한동안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아라비아 사막에 온 소감이 어떤가?”

  무길이 감았던 팔을 풀며 말했다.

  “흠, 미국으로 말하자면 서부 개척자라도 된 기분이랄까.”

  필성이 가슴을 펴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싸한 비유로군.”

  “이, 진 필성이 망나니 생활을 청산하고, 새 인간이 될 테니 두고 보게.”

  그가 결연히 어금니를 물었다.

  순간, 무길의 눈앞에 창을 꺾어 삐딱하게 쓴 모자에 교복 윗단추 두 개를 풀어놓은 고교생 진 필성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새벽에 쟤하고 맞짱 한 번 떴지. 짜식이 쎄긴 쎄더군.”

  필성이 해를 가리켰다.

  “하하, 천하의 진 필성에게도 적수가 있었군. 근데 걔가 어디 맞설 상대인가. 하루빨리 익숙해져서 친구처럼 지내야지. 성질 더러운 망나니는 어쩔 수 없잖아.”

  무길이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밀었다.

  “그러려면 이게 필수품이야.”

  “웬 선물?”

  포장을 풀어 본 필성이 눈이 똥그래졌다.

  "어, 이거 선글라스 아니야?”

  “이곳에서는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선글라스 없이는 못 산다네.”

  “어허, 내가 한국에서 사 왔는데 이놈은 내 것보다 훨씬 진하군.”

  “한국에서 쓰는 거로는 어림도 없지.”

  "자네 같은 친구가 옆에 있어 든든 하이. “

  "나도 자네가 있어 외롭지 않게 됐네."

  두 젊은이는 굳게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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