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재골목
허 기사가 차를 세웠다. 자재 골목에 도착한 것이었다. 담맘 시내 곳곳에 건자재상이 있지만, 이곳에는 온갖 건자재상이 모여 있어 웬만한 것들은 다 구할 수 있었다.
무길은 잡자재를 취급하는 알 와벨 쪽으로, 부국은 반대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둘은 현지 구매 업무를 분담했는데, 무길은 관로부(2, 3, 4, 5공구)와 건축부, 부국은 구조물부(1공구)와 워크숍 자재를 맡았다.
“앗 살라 무 알라이 쿰!(당신에게 평화가 있기를!)”
“알라이 쿰 앗 살라 무!”
무길의 인사에 점원인 무하마드가 답하며 그를 맞았다.
무길이 다짜고짜 물었다.
“작은 물바가지 있어? 20리터 보온 물통하고.”
사우디는 과거 영국 식민지였고, 학교에서 회화 위주의 수업을 받아, 영어만 하면 언어소통에 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엄, 마니 마니 이써.”
파키스탄인인 무하마드는 짤막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익살을 부려 한국인 구매자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 덕분에 이 상점은 규모가 커서 창고지기와 허드레일하는 청년까지 두고 있었다.
“작은 물바가지 200개. 보온 물통 20개. 빨리 줘.”
“발리 발리, 한쿡사람 온제나 발리 발리.”
무하마드가 다섯 손가락을 동그랗게 모아 보였다.
‘원미닛’이라는 뜻이다. 날씨가 워낙 덥다 보니 말하기가 귀찮아 생긴 제스처일 것이다.
“그래, 빨리빨리. 이건 긴급 구매 건이야.”
구매자들이 몰려들기 전에 처리하려고 무길이 서둘러댔다. 사우디 상점 영업시간은 오전 9~12시. 오후 4~6시로 하루 5시간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곳 사람들은 굼벵이처럼 일 처리가 더뎌, 구매자들은 언제나 시간에 쫓기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댔다. 지구상에서 가장 성질 급한 한국인과 가장 느긋한 사우디인의 만남인 셈이었다. 그렇다 보니 한국인들이 이곳에 와서 제일 먼저 하는 아랍어는 ‘얄라 얄라‘(’빨리빨리‘라는 뜻으로 무례한 표현. ’하미 하미‘로 순화)라고 한다.
이내 구매자들이 몰려들어 무하마드와 가게 주인인 할리드가 바빠졌다. 주문받는데 정신이 팔려서인지 바로 내줄 거 같던 물건이 좀처럼 나오질 않았다.
“무하마드, 금방 나온다더니 어떻게 된 거야?”
무길이 다그쳤다. 오늘은 유별나게 구매 건이 많아 바삐 다녀야 할 판이었다.
“아, 가게 창고에 있는 게 몇 개 안 돼서 야외 창고에 연락해 놨어. 조금만 기다려.”
무하마드가 다시 다섯 손가락을 모아 보였다.
이 친구 아까 전화로 뭐라고 지껄여 대더니 바로 그거였구나. 무길이 잔뜩 조바심이 났다.
“그럼 애초에 그렇게 말했어야지. 기껏 기다리게 해 놓고는.”
다른 일을 먼저 볼 수도 있지만, 그러다가 낭패 본 경우가 많아 긴급 구매 건은 확실하게 처리해야 했다.
“걱정 마. 곧 올 테니까.”
무하마드가 또 한 번 다섯 손가락을 모아 보였다. 한데 이곳 사람들의 ‘원미닛’은 믿을 수가 없었다. 10분이 될지, 한 시간이 될지, 아니면 내일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30분, 40분이 지나도 깜깜무소식이었다.
“무하마드, 벌써 40분이 지났어, 40분이. 나 할 일이 태산이라고!”
무길의 말에 짜증이 가득했다.
“그럼 다른 가게 먼저 다녀와. 우리 물건은 나중에 가져가고.”
“잔뜩 기다리게 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무길이 속이 부글거렸다. 성질대로라면 몇 대 줴박아도 시원치 않았다.
하지만 그래 봤자다. 이 나라에서는 급하다는 말이 도통 통하질 않아 혼자 식식대다가 제풀에 사그라지게 마련이었다.
“그럼 약속해. 10시 반까지 올 테니, 그때까지는 틀림없이 갖다 놓는다고.”
“인샬라(틀림없어)!”
“단단히 약속한 거야. 다시 말하지만 이건 긴급 구매 건이야. 세상없어도 오전 중에 처리해야 한다고. 그때 가서도 딴소리하면 안 돼. 10시 반까지야.”
무하마드는 인샬라를 반복했다.
무길이 서둘러 다음 가게를 찾았다. 수도꼭지와 수도관, 봉인 테이프, 줄자, 전동드릴, 볼트 너트, 합판, 녹색 실내 유성 페인트, 주방 기구 등등 오전에 처리해야 할 물건들이 줄줄이 늘어섰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건 무길의 사정일 뿐. 상인들은 하나도 급할 게 없었다. 그들은 손가락을 모아 보이며 ‘원미닛’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나마 무하마드만큼 움직여 주는 상인이 없기에 알 와벨에 손님이 끓는 것이었다.
절반도 일 처리를 못 했는데, 어느새 11시 30분! 쌀라 타임 30분 전이었다. 자재 골목 시계는 언제나 빨랐다. 무길은 뛰다시피 알 와벨로 돌아왔다. 애초에 이 시간에 올 생각이었으나, 10시 30분으로 시간을 당겨 잡아 놨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자, 무하마드가 아차 싶었는지 당황한 표정이 됐다. 이내 다섯 손가락을 모아 보이며 수화기를 들었다. 무길의 가슴이 철렁했다.
“아직도 안 왔단 말이야!?”
무하마드가 몇 마디 주고받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미안해. 창고가 굉장히 바쁜가 봐. 오후에나 되겠네.”
“맙소사!”
무길이 맥이 탁 풀렸다.
“정말 미치겠네. 지금 누구 놀리는 거야?”
그러나 무하마드의 대답은 단 한마디.
“인샬라.(신의 뜻이야)”
별로 미안한 기색도 없었다. 그들은 ‘(신의 뜻이라면) 틀림없다’도 인샬라, ‘(신의 뜻이니) 어쩔 수 없다’도 인샬라로, 두 가지 경우 모두 이 단어 하나로 통했다. 무하마드는 그럴래서 그런 게 아니라 신의 뜻인데 자기인들 어쩌겠느냐는 태도였다.
곧 쌀라 타임! 실랑이할 시간도 없었다. 무길이 주차장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중에 우렁찬 남자 목소리가 시가지에 울려 퍼졌다.
알라호 아그바르
알라호 아그바르 아샤하도 안라 일라하 일라 알라
아샤하도 안 모함아단 리술루 알라······
상인들은 구매자들을 밖으로 밀어내고, 셔터를 내린 다음, 서둘러 사원으로 몰려갔다. 쌀라 타임(살라트 Salat, 모슬렘의 예배 시간으로 이 시간에는 상행위는 물론 예배 이외의 어떤 일도 엄격히 금지된다.)이 시작된 것이었다.
무길과 부국, 허 기사는 자재 골목을 돌며, 상점 앞에 내놓았던 구매 물건을 서둘러 차에 실었다.
점심 식사 후 오침 시간. 무길은 호랑이가 물어가도 모를 만큼 깊은 잠 수렁에 빠졌다. 지난밤 수면이 부족했던 데다가 긴급 구매 건으로 신경이 곤두섰던 탓에 몸이 파김치가 된 것이었다··· 그래도 2시간 죽었다 깨어나니 한결 몸이 가벼워졌다. 역시 잠은 신이 준 최고의 피로회복제!
공부하기 싫은 아이 학교 가듯 사무실로 향하는 무길의 발걸음이 터벅거렸다. 젠장, 무슨 말을 들으려나? ‘그런 일 하나 제때 처리 못 하냐?’며 한 마디씩 하겠지. 최 소장, 염 부장, 박 차장, 시아버지가 셋이나 되니.
구시렁거리며 사무실 가까이 이르렀을 때 그의 눈이 반짝했다. 최 소장과 염 부장이 어딜 가는지 함께 차에 오르는 게 아닌가! 와우, 한꺼번에 둘씩이나 자리를 비켜주다니······.
제길, 그래도 시아비 하나는 말뚝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겠지··· 근데 이게 웬일! 오늘은 무척 운이 좋은 날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는데, 박 차장이 전화통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 아니, 말이 되는 얘기를 해야지. 말이! 오늘까지 도착해야 할 물건을 아직 선적도 안 했다니. 도대체 어쩌자는 거요! 어린애 장난도 아니고, 날 아주 죽일 작정이요?”
지금 박 차장에게 물바가지 따위가 안중에 있을 리 없었다.
‘앗싸, 좋았어.’ 말썽을 일으킨 아이가 들키지 않고 무사히 넘긴 것처럼, 무길은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철부지 같은 생각도 들었다. ‘앞으로도 이런 때는 누구든 박 차장 속을 팍팍 썩여줬으면 좋겠다. 헤헤.’
오후 4시. 가게 문 셔터가 다 올라가기도 전에 무길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이젠 ‘인샬라’ 소리는 듣기도 싫어. 30분 내에 와 있지 않으면 가만 안 있겠어.”
당장 잡아먹을 듯 험악한 표정을 짓고 쥔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오케이, 걱정 마. 무하마드 약속 꼭 지킬게.”
무하마드는 전화통에 대고 뭐라고 소리치고 나서 오전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무길이 배관 상점에서 3cm 수도꼭지 12개와 3cmx3m 수도관 4개를 사고, 볼트넛트 가게와 공구점에 들렸다 돌아와 보니, 집 나갔다 돌아온 자식처럼 물바가지와 물통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삽 30개 등 오후 구매 물건을 더 하니 짐이 상당히 많아 허드렛일 하는 쿠레이에게 실어 줄 것을 요청했다.
한데 녀석이 삐딱하게 나왔다.
“내가 왜 실어줘야 되는데?”
“왜라니? 장사하는 사람이 그런 서비스도 안 한단 말이야?”
“구매했으니 이젠 당신 물건이잖아. 자기 물건은 자기가 실어야지.”
“아니, 그럼 쿠레이가 하는 일은 뭐야?”
“물건을 상점 앞까지 내다 줬잖아.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내 일은 끝났고 이제부터는 당신 일이야.”
무길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근데 이 녀석이 똥배짱을 부리면 당할 수가 없다.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고, 달래서라도 일을 빨리 끝내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실어줄 거야?”
“펩시, 그리고 햄버거.”
녀석이 기다렸다는 듯 손으로 콜라 마시는 시늉을 해 보이며 느물거렸다.
“그래, 알았다. 5리얄(원:리얄 300:1)이면 되지?”
무길이 지폐 한 장을 내밀었으나, 쿠레이는 손을 저으며 받지 않았다.
“나 혼자만 먹을 순 없어. 옆 가게 친구한테 항상 얻어먹기만 하거든.”
녀석이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어이쿠, 내가 졌다, 졌어.”
무길이 주먹을 쥐어 보이며 지폐 한 장을 더 얹어줬다.
10리얄을 받아 든 녀석이 낄낄거리며 혼잣말했다.
“꼬리는 돈이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