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따르릉, 따릉, 따릉, 따르르릉······”
새벽 5시 반. 알람 소리가 요란했지만, 두 젊은이는 깊은 잠 수렁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따르릉, 따르릉, 따르르르······”
10분은 울어댔을까. 부국이 비몽사몽 간에 알람 버튼을 누르고는 다시 엎어졌다.
“으···으, 미치겠네.”
몸을 비틀어대며 안간힘을 쓰다가, 어기적거리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건둥건둥 세수하고 화장실에서 나와 소리쳤다.
“가-강 형, 일어납시다. 일어나!”
몇 번을 외쳐도 강무길은 꿈쩍을 않는다. 안 되겠다고 판단한 부국이 혼자 식당으로 달려 나갔다.
아귀 같은 잠 귀신이 무길에게 눌어붙어 놔주질 않았다. 연일 야간근무를 하는 데다 지난밤에는 새벽 3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니 3시간도 못 잔 셈이었다.
20분이나 지났을까. 식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가는 길에 부국이 숙소 양철판 문짝을 뚜드려 댔다.
“강형, 5분 전이요! 5분 전!”
순간 무길이 용수철처럼 퉁겨져 일어났다. 허겁지겁 근무복을 꿰고 쏜살같이 사무실로 달려 나갔다. 6시까지 사무실에 골인해야 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
~ ~ ~ ~ ~ ~ ~ ~ ~ ~
확성기에서 터져나오는 노랫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며 무길의 발걸음에 채찍을 가한다. 곁눈으로 보이는 기능공 숙소는 텅 빈 채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넓은 캠프에 사람이라고는 헐떡거리며 달려가는 무길뿐이었다.
6시 정각. 그가 사무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확성기가 입을 닫았다. 모든 직원들이 근무태세를 갖췄고 무길이 마지막 빈자리에 몸을 던졌다.
지각은 아니라도 뒤통수가 근질거렸다. 괜스레 이것저것 문서를 뒤적였지만, 못다 한 새벽잠이 꺽꺽 하품을 쏟아냈다. 정신이 들까 하고 커피를 타 마시며 새삼스러운 듯 사무실을 둘러봤다. 맞은편 벽면에 걸린 공사 내역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공사 내역
공사명 : Saudi Arabia Dammam Water & Sewage Pipeline Project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상하수도 공사)
발주처 : Saudi Arabia Dammam MMRA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도시 지방성)
공사금액 : US$ 125,000,000.
공사기간 : 1975. 5. 1. - 1977. 4. 30.
총연장 길이 : 858.65km
시공사 : Guk-Je Development Co. Ltd.
감리사 : xxx xx xxxx xxx xx xxxx
엔지니어링사 : ooo oooo ooo oo oooo oo ooo
공사 내역 왼편에는 현장 조직표가, 오른편에는 작업 현황표가 걸려있었다.
현장은 구조물부(Pumping Station, 1공구)와 관로부(Pipeline, 2, 3, 4, 5공구)로 구성돼 있고, 사무실에는 총무부, 경리부, 자재부, 3개 부서가 들어와 있으며, 중기부는 사무실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자리했다.
작업 현황표에는 월 단위 예정 공정이 표시돼 있는데, 각 공구의 진도 현황을 보여주는 막대가 새순 돋듯 조금씩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공사 내역 위에는 양 회장 사진이 걸려있었다. 강렬한 인상에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넘쳐났다. 2개월 전 착공식 날 그의 기념사가 아직도 무길의 기억에 생생했다.
“산업 전사 여러분!
국제개발은 오늘 일대 모험을 감행합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담맘 상하수도 공사, 공사 금액이 무려 1억 2천5백만 불! 이제까지 상상조차 못 했던 거액입니다.
이 대형 공사를 성공적으로 끝내면, 국제개발은 한국 굴지의 건설사로 우뚝 설 것입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회사는 난파선 신세를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회사의 운명이 걸린 공사지만, 아무도 성공을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글로벌 건설사도 시공할 엄두를 못 내는 최악의 공사환경 때문입니다.
중동 전문가들은 중동 개발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고 있습니다.
‘막대한 오일달러만 믿고 밀어붙이는 중동 개발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숨쉬기조차 버거운 불볕더위 속에서의 건설공사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고 말이죠.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글로벌 건설업체들이 희생양이 됐습니다. 오일쇼크로 세계 경제가 얼어붙은 상황에서 전례 없이 거대한 공사금액은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었겠죠. 일부 건설사들이 무모하게 사막에 발을 디밀었던 겁니다.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처음 얼마 동안은 죽기를 기 쓰고 버뎠겠죠. 그러나 게임은 싱겁게 끝났습니다. 살인적인 찜통더위에 항우장사가 어디 있으며 돈은 다 뭐란 말입니까. 하나같이 두 손 바짝 들었으니, 공사 초기에 투입된 자금은 사막의 밥이 됐고, 계약위반으로 굴욕적인 페널티까지 헌납해, 내로라하는 글로벌 건설사의 체면이 말씀이 아닙니다. 그 후부터 중동은 '건설사의 무덤'이라며, 아무도 이 노다지 시장을 넘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인입니다. 불가능을 모르는 민족입니다. 불같은 도전 정신과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무장한 한국인이 못 할게 뭐란 말입니까. 온갖 가시밭길을 헤치고 이 난공사를 완수하고 말 겁니다."
양 회장은 여기서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국제개발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산유국은 천문학적인 오일달러를 무기로 광대한 사막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야심에 차 있습니다. 모래뿐인 사막에 낙원을 건설하려면, 도로, 주택, 수도, 학교, 병원, 공장, 항만, 공항, 전기 통신 시설, 담수화 시설 등 개발 사업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 공사에서 얻을 경험과 노하우를 디딤돌 삼아 이 거대 시장을 공략할 것입니다. 무진장한 먹잇감으로 몸집을 키우며 글로벌 건설사로의 꿈을 펼칠 것입니다.
회사의 성장은 곧 여러분의 성장입니다. 국제개발이 한국 굴지의 건설사가 되고 글로벌 건설사로 도약하는 동안, 여러분의 직위는 빠르게 올라가고 급여는 지금과 비교가 되지 않을 겁니다. 또한 증권시장에서는 국제개발 주가가 날로 상승해, 우리 사주는 여러분의 미래를 책임지는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기념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온 양 회장은 뚜벅뚜벅 캠프 입구로 걸어갔다. 거기에는 물이 가득 찬 양동이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가 그중 하나를 들어 올려 정성스럽게 모래밭에 부었다··· 모래밭이 단숨에 물을 삼켜버렸다.
뒤를 이어 최 소장, 각 공구장들, 부장들, 자재부 박 차장이 차례로 양동이를 비웠다. 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각 공구 기사와 사무실 직원까지 한 동이씩 부었다.
부으면 붓는 대로 물을 삼키던 모래밭에 마침내 가는 고랑이 생겨났다. 쫄, 쫄, 쫄, 쫄······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처럼, 사막 위로 꼼틀꼼틀 고랑을 따라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주위가 술렁였다. 누군가 소리쳤다.
"사막에 물이 흘러간다!"
양 회장이 주먹을 불끈 쥐고 외쳤다.
"알라신이시여! 한국에서 국제개발이 왔소이다! 당신의 땅에 생명수를 공급하러 왔소이다!"
양 회장의 말을 받아, 총무부 염 부장의 선창으로 전 직원이 하나 되어 외쳤다.
총무부장 : “알라신이시여, 한국에서 국제개발이 왔소이다!”
전 직원 : “알라신이시여, 한국에서 국제개발이 왔소이다!”
총무부장 : “당신의 땅에 생명수를 공급하러 왔소이다!”
전 직원 : “당신의 땅에 생명수를 공급하러 왔소이다!”
산업 전사들의 함성이 사막의 새벽을 깨웠고, 동녘 하늘에서는 독기를 품은 해가 몸을 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