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 어느 날. 나는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여행 일정을 구상하며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아내와 함께 해외 유학 중인 손주를 보러 가는 길이었는데, 비행기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공항은 설렘으로 일렁였다. 저마다 세련된 옷차림에 각양각색의 선글라스를 눌러쓰고 큼직한 여행용 가방을 애완견처럼 달고 다녔다. 평소 그리던 곳을 찾아 나선 길이니 한껏 부풀어 있으리라.
내가 젊었을 때는 해외여행이 부유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외국 바람 한 번 안 쐐 본 사람이 없는 세상이 됐다. 그뿐이랴. 떼 지어 다니는 일본인 관광객을 손가락 빨며 바라보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지금은 외국 관광지에 한국인이 넘쳐나는 게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니 격세지감이다.
이렇듯 폭증하는 여행수요에 힘입어 인천공항은 눈부신 성장을 이뤘다. 세계 공항서비스 평가(ASQ)에서 12년 연속 세계 최고 품질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항으로 선정되는 등 한국의 자존심이 된 지 오래다.
한데 나는 인천공항이 좀 낯설었다. 아내도 김포공항은 친근감이 드는데, 인천공항은 어쩐지 ‘가까이하기엔 먼 당신’ 같은 느낌이란다. 소위 ‘꼰대’ 티를 못 벗은 탓인가.
아내가 북적이는 인파에 시선을 흘리며 감회 어린 듯 말했다.
“공항에 앉아 있자니 젊은 시절 당신 사우디 갈 때 생각이 나네요. 이역만리 낯선 땅에 남편을 보내며 아낙네들이 눈물깨나 흘렸지요.”
40여 년 전 얘기였다.거의 반세기 가까이 된 일이지만, 지금도 녹화영상을 보듯 내 기억에 생생했다.
김포공항 국제선 대기실. K건설 작업복의 청년들과배웅 나온 가족 친지들로 시끌벅적했다. 그 시절에는 누가 외국에 간다면 배웅하는 사람들이 주렁주렁 달렸었다.
작업복 청년들이 난생처음 탈 비행기를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 얘기를 나누는 모습도 보였다. 내 옆에 있는청년들 사이에 오가는 말이 내 귀를 당겼다.
“중도 귀국 하마 왕복 비행기 요금 물린다 캤제? 모래벌판 구경값 한번 뻑쎄잖노.”
“야, 어데 비행기 요금뿐이가? 그동안 이래저래 퍼질른 돈이 얼마고? 빤쓰까지 벗는 거나 다름없제.”
“그란디 어떤 놈이 중도 귀국을 할라카나?”
“짜슥아, 누가 그라고 싶어 그라냐. 여름에 30도만 넘어도 헉헉대제. 거개는 거반 50도라지 않노, 50도!”
그 옆 젊은이가 끼어들었다.
“그런 찜통더위에 삽질하고 망치질하는기 인간이 할 짓이가? 그것도 허구한 날 그렇게 해봐라카이. 사람이 견딜 노릇이냐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 내야제. 좆대가리 힘 있을 때 벌지 못하마 평생 이 모양 이 꼴로 넘에 집살이 면치 못하는기라. 뒈지더라도 거개서 뒈져야 해.”
그중 제일 연장자로 보이는 남자의 말이었다.
“설마 생사람이 바비큐야 되겠노.”
처음 말을 꺼냈던 청년이 입을 앙다물었다.
아내 쪽 청년들은 또 다른 문제로 왈가왈부하고 있었다.
“그기 여자 치마 한 번 들췄다가는 모가지라 했지비?”
“이런 미친놈. 어디 감히 여자 얘기를. 모가지보다 먼저 꽂을대부터 뽑아 버리제.”
“갸는 마눌한테 맡겨놓고 가야제. 그기서 쓸 일이 있남. 아까운 물이 질질 샐 텐디.”
“그렁게 무슨 재미로 산당까, 하룻밤에 열 번도 모자랄 거구먼.”
“어허, 내 청춘 모래밭에 묻었다고 생각하라니께.”
집결시간이 되자 총무부 직원들이 K건설 깃발을 높이 세워놓은 곳으로 근로자들을 불러 모았다.
“그동안 당신 속만 썩이고 할 말이 없소, 사우디행을 계기로 반듯이 착실한 남편, 착실한 가장이 되리다.”
필성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가족과의 작별 인사로 도떼기시장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정렬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요 했지만, 정렬이 완료되자 근로자들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총무부장이 임시 연단 위로 올라왔다. 사원과 대리급들의 지휘를 받으며 주눅 든 근로자들은, 부장이 마이크를 잡자,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산업 전사 여러분!
여러분은 참으로 어려운 전투에 나섰습니다. 50도에 육박하는 불볕더위에서 공사 일을 하겠다니··· 이게 가능한 일일까요.
누가 봐도 미친 짓이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러분은 이 말도 안 되는 일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용기가 솟아났을까요. 이유는 단지 하나. 우리네 살림살이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어릴 때는 풀뿌리 나무껍질을 씹고, 허기진 배를 물로 채우며 자랐습니다. 가난은 곧 공포였죠. 가난에서 벗어나겠다는 몸부림이 여러분을 여기에 서게 했다고 믿습니다.
내 나라에서는 일하려 해도 일거리가 없지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나날의 연속입니다. 그렇다 보니 찌든 살림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대대로 가난을 대물림하고 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의 사슬을 끊기 위해 일거리만 있으면 지옥까지도 따라가겠다는 게 여러분의 각오일 겁니다.
산업 전사 여러분!
도전하는 자에게 중동은 기회의 땅입니다. 중동에는 일거리가 지천으로 널렸으니까요. 얼마든지 일하고 돈 벌 수 있어요. 몇 년만 썩으면 전세금 마련해 피 같은 돈 사글세로 새 나가지 않고, 더 독하게 마음먹으면 꿈같은 내 집도 마련할 수 있어요.
또한, 여러분의 피땀 어린 돈으로 자녀들은 마음 놓고 학업에 전념할 수 있지요. 그렇게 공부한 자녀들이 커서 어떻게 될까요? 내 자식이라고 의사 되지 말고, 판검사 되지 말라는 법 있습니까! 내 자식이라고 국회의원, 장관 못 된다 법 있습니까!
중동에서는 누구나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잠잠하던 대열이 술렁대고,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아,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
“인생 역전시킵시다, 인생 역전! 우리도 한번 잘살아 봅시다!”
너도나도 애들처럼 신바람이 났다.
“의사, 판검사 아들 좋지요!”
“국회의원, 장관 아들 좋고 말고요!”
총무부장이 주위를 진정시키고 한층 목청을 높였다.
“여러분! 각오를 새롭게 하는 의미에서 다 같이 작업 구호를 외쳐봅시다. 내가 선창, 여러분이 복창, 큰소리로 할 수 있죠?!”
‘네!!!’ 근로자들의 함성이 천둥 치듯 울렸다.
총무부장 ; “가마솥더위 속에 우리의 꿈이 있다!”
근로자들 ; “가마솥더위 속에 우리의 꿈이 있다!”
총무부장 ;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
근로자들 ;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다!”
총무부장 ; “중도 귀국은 곧 죽음이다.!”
근로자들 ; “중도 귀국은 곧 죽음이다!”
목소리 작은 사람은 행여 안 보내 줄세라, 구호 소리가 공항 대기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때의 김포공항과 지난봄 우리 부부가 본 인천공항이 어떻게 같은 나라 국제공항이란 말인가.
가난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가족 간의 생이별은 역사가 됐고, 비록 머리는 가마솥더위보다 무서운 세월을 이기지 못해 백발이 됐지만, 우리 부부는 해외 유학 중인 손주를 보기 위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