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용히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불을 켜고 싶지 않아 어두운 채로 남겨두었다. 병적으로 새하얀 벽지가 눈에 보인다. 불을 켜면 곧 벽지들이 나에게 달려들 것이다. 나풀나풀 날아와 목을 졸라 질식시킬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가 나았다.
문득 체조실에서 만난 그녀가 생각난다. 예지,라고 했었다. 예쁜 여자였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것으로 보아 밝고 웃음이 가득한 집에서 자란 게 분명하다. 나와는 다르다. 그녀를 생각했다는 사실 자체에서 죄책감이 밀려온다. 이 감당할 수 없는 우울의 늪에 그녀를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나는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고 행복해서도 안 되는 놈이다. 방학이 끝나면 자퇴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방학을 맞아 본가로 내려오게 되어 아르바이트도 그만둔 참이다. 사장은 한 사람이 아쉽다며 말을 돌렸지만, 방학 기간 기숙사 잔류비는 학기중보다 비쌌기에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 시간에 걸쳐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학교에 남은 인연도 없다. 그들은 모두 밝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다. 개인적인 불행의 척도나 경제적인 어려움을 가늠할 길은 없다. 하지만 그저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그걸 감지할 수 있다. 찌푸려지지 않은 미간, 살짝 올라간 입꼬리, 가벼운 발걸음. 모두 내가 가질 수 없는 행복의 요소이다.
불을 켜지도 않았건만 벽지들이 달려와 목을 조른다. 턱밑까지 그림자를 드리우며 종용한다. 무엇을 종용하는지 알 수 없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다. 공포가 어둠을 타고 몸을 붙잡는다. 벗어나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겨우 검지 손가락 한두 마디만 까딱거릴 뿐이다. 숨이 폐까지 넘어가지 않고 목울대 언저리에서 맴돈다. 전자충격봉을 맞은 것처럼 경직된 몸에 산소가 스며들지 않아 시야가 점점 흐려진다. 삼키지 못해 입가로 흘러나온 침이 밭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지만 흠, 핫 따위의 볼품없는 신음소리만 겨우 흘러나올 뿐이다. 그녀가 보고 싶다. 한 순간뿐이지만 그녀는 나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채를 지닌 사람이었다. 이 지독하고 불쾌한 무채색의 세계에 유일한 색이었다.
머릿속에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의 모습이 재생된다. 상상 속에서 우리는 연인처럼 걷는다. 우리는 3월의 끄트머리에 손을 잡고 한강변을 걷는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에 벚꽃이 흩날린다. 그녀는 아직 조금은 춥다며 옷깃을 여미고, 나는 윗옷을 벗어 그녀에게 걸쳐준다. 그녀에게는 상쾌한 베리 향이 난다.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으나 진한 달콤함이 코끝을 스치는 것으로 보아 색이 진한 베리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 내가 떠올릴 수 없는 무지의 시간이 지나고 우리는 호텔에 들어간다. 그녀는 가볍게 웃으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있다. 단추를 하나 푼 하얀 블라우스 위에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검은색 테니스 스커트를 입었다. 그 모습이 퍽 아름답다. 그녀는 천천히 카디건을 벗는다. 나는 어쩔 줄 몰라 그저 바라보고만 있다. 부끄러웠는지 그녀는 불을 꺼달라 말한다. 화장실, 메인, 나이트 스탠드를 전부 껐지만 아직도 어디선가 불이 은은하게 들어와 우리를 비춘다.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할지 몰라 허둥대자 그녀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며 내 손을 잡아준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아릿한 향기가 몸을 사정없이 두드린다. 머리에 피가 몰려 판단이 서지 않는다. 허겁지겁 옷을 벗고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키스를 했다.
앞니가 부딪히며 너는 웃음을 터뜨린다. 너는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천천히 입술을 갖다 댄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아래로 피가 몰려 빳빳해진다. 입술을 뗀 너는 "사랑해."라 말하며 눈을 감는다.
그리고 방문이 열린다. 어머니가 들어온다.
"뭐 하고 있니? 불도 다 꺼놓고."
어머니는 문을 열어젖히고 스위치를 눌렀다. 눈앞이 뿌옇다. 상상의 희열이 남아 아직 마음이 달뜨다. 이내 동공이 줄어들어 어머니의 얼굴이 보이자 퓨즈가 나간 것처럼 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아랫도리도 빳빳하게 굳어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어머니의 손에는 빨래가 한 무더기 들려있었다. 기숙사에서 가져온 빨랫감이 어느새 건조까지 완료되었나 보다. 어머니는 마구잡이로 서랍을 열어 속옷이며 양말 따위를 쑤셔 넣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너무나 무력한 돌배기 아기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부모의 도움 없이나 움직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나약한 작은 존재. 아까의 희열을 배반하듯 더 큰 상실감과 무기력함이 찾아왔다.
"제가 할 수 있어요..."
나는 괜히 반발심이 들어 웅얼거렸다. 말이 제대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입가에 아무렇게다 떠돌았다. 어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속옷을 접어 아랫칸에, 양말을 말아 위칸에. 순간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어머니의 손에 들려있던 속옷을 빼앗고 말했다. 형과 아버지가 들으면 작은 반항이 가족 전체의 싸움으로 번질 수 있으니 목소리는 작았다.
"제가 할 수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저도 기숙사에 살아서 빨래하고 정리하는 방법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런 건 이제 제가 할게요."
나는 손에 들린 속옷을 접으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적어도 그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평생 반항이라고는 해본 적 없이 깔아뭉개지는 삶을 살았기에 슬며시 고개를 치켜드는 울음 기를 숨길 수 없었다. 어머니는 무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를 바라보는 두 눈이 소름 끼치게 비어 보였다. 사랑, 분노, 애착, 절망, 고독... 그 무엇도 발견할 수 없는 두 개의 구멍이 나를 집어삼켰다. 벽지가 다시 춤을 추듯 너울거리며 목을 옥죄어온다. 몸이 뻣뻣해지고 숨이 가빠진다. 살기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누구도 묻지 않은 말을 뱉었다.
"저는 이제 어머니가 생각하는 어린애가 아니에요. 용돈도 받지 않고 기숙사비도 제가 벌어서 내잖아요. 등록금은 대주시지만 제가 대학에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재수도 형이 대학에 못 가고 있으니 너라도 가야 한다는 생각에서 시켰고, 교대도 어머니가 교사가 되고 싶으셨기에 마음대로 지원하신 거잖아요. 제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알기나 하세요? 관심이나 있으시냐고요!"
쏟아내듯 말을 내뱉자 몸이 조금 편해진다. 너울거리던 벽지도 주춤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호흡이 서서히 돌아온다. 어머니는 여전히 싸늘한 무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이내 세탁물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조용히, 소리도 없이 닫힌 문 사이로 작은 한숨이 밀려들었다. 불이 켜져 있었지만 어두울 때보다 훨씬 갑갑했다. 이윽고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아버지의 손에는 굵은 나무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 몰래 체육대회를 빠지고 도서관에 숨어있던 게 들킨 이후 처음 보는 물건이다. 저 막대기에 맞으면 맞은 부위가 발갛게 달아오를 뿐 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님이 애용했다.
때리는 입장에서 죄책감을 남길만한 흉터가 남지 않기에 적당한 체벌이라 생각하는 듯싶지만 맞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저 막대기는 아프다. 막대기는 질긴 겉피부를 뚫고 충격을 속으로 전달한다. 한 대 맞을 때마다 뼈를 울리는 고통이 엉덩이부터 척추를 타고 머리까지 꿰뚫는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처는 속에서부터 곪아 오래도록 낫지 않는다. 나는 오래도록 간직한 옛 흉터들의 비명을 들으며 두려움에 떤다. 이제는 검게 변해버린 엉덩이의 선들이 떨린다. 아버지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엎드려라."
나는 침대 옆으로 내려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엉덩이를 높게 든다. 수백 번도 더 취한 자세다. 영혼에 각인된 공포가 완벽한 자세를 유지하게 한다. 아버지는 때리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막대기를 내려친다. 짜릿한 고통과 함께 억눌린 신음소리가 입 밖으로 새어나간다. 잘못했다고 빌거나 눈물로 호소해서는 안된다. 자세가 흐트러져서도 안된다. 어떤 모습을 보여도 막대기는 아버지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내려쳐질 것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때를 기다리며 최대한 다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뿐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고통은 어느새 작은 희열로 다가온다. 나는 그것이 환상임을 알고 있다. 육체와 정신에 가해지는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환상. 나는 그것을 자주 느꼈다.
환상 속에서는 경찰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부모님을 체포하기도 했고, 셜록홈스가 나타나 내 시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근엄한 목소리로 "비밀이 모두 풀렸습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환상에서 나는 시체였고 나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닥에 추하게 엎드리고 침을 흘리며 차갑게 굳어버린 그것은 나의 시체였다. 내 시체는 경찰과, 검시관, 탐정 따위에게 마음대로 주물러졌다. 환상에서도 나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고통이 정점에 이르며 환상은 점점 구체화된다. 이번에는 누구일까. 머리카락이 목 언저리까지 내려온 것을 보아 여자인가 보다. 환상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길었다. 남자들은 모두 머리카락이 짧았다. 한 손에 쥐어질 것만 같은 가는 목이 보인다. 여자는 발그레한 볼을 내 눈앞에 가져다 댄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나는 고통을 넘어서는 아득한 부끄러움을 느끼며 몸을 떤다. 몸이 틀어지며 허벅지를 맞았는지 경험한 적 없는 아찔한 고통이 하얗게 밀려온다. 아버지는 멈칫하며 자세를 가다듬고 말한다.
"자세 똑바로 잡아라."
그러나 아버지의 체벌은 내게 더 이상 영향을 주지 못한다. 적어도 그 순간에는 그랬다. 매질은 계속되었지만 나는 새로이 등장한 환상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다. 무기력, 고독, 절망의 토지에 드리운 그 환상은 내가 알아차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버지가 매질을 그만두고 숨을 몰아쉬는 것도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곧 숨을 고르고 선언했다.
"다음 주까지 집에서 나가라. 혼자 할 수 있다면 어디 한번 알아서 살아봐라."
그때까지도 나는 환상의 격류를 막느라 아버지의 말을 듣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