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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6)

by 전창훈

2016년 8월, 아직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나는 부평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집에서 쫓겨난 후 모아둔 돈과 학자금 대출을 합쳐 겨우 방은 구했지만 살길이 막막해져 무슨 일이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은 나와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그 사실에 화가 나거나 서운하지는 않았다. 반대로 개운하다거나 시원하지도 않았다. 언제가 되었든 자식은 부모 곁을 떠나야 한다. 방식의 차이일 뿐이다.


그리 깔끔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결국 부모님의 품을 떠났다. 독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21년을 살아온 집은 이제 관심 밖이다. 나의 온 신경은 그녀에게 향해있다.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친구들과 놀고 있을까, 아니면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을까.


사라지지 않는 환상 속에서 그녀는 점점 구체적인 형체를 갖춘다. 술에 취해 달아오른 볼이 보이고, 웃을 때 드러나는 치아가 싫어 손으로 살짝 가리는 모습이 보인다. 집중할 때는 알이 큰 무테안경을 쓰고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음식을 씹을 때는 소리가 나지 않게 입술을 앙다물고 오물거린다. 이제 그 환상에 나도 등장한다. 나는 그녀의 술잔에 술을 따르고 함께 잔을 부딪힌다. 입가에 묻은 양념을 휴지로 살짝 닦아준다. 찌푸린 미간을 검지 손가락으로 짚어 살짝 밀어준다. 그녀의 부모님은 딸에 대한 사랑이 가득하지만 그로 말미암은 통제가 엄격하다. 그녀는 부모님이 고루하다고 투덜거리며 통금 시간에 맞춰 집에 들어간다. 나는 그녀를 바래다주며 나란히 걷는다. 우리는 손을 잡고 있으며 집 앞에서는 가벼운 입맞춤을 나눈다. 뻔한 레퍼토리지만 우리는 연인이고 서로를 사랑한다. 절대적인 신뢰로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다. 부모의 위압도, 주변의 시선도 끼어들 여지가 없는 완전무결한 관계다.


환상이 폭주하여 현실을 침범한다. 벽이 다시금 넘실거린다. 아아, 저 벽은 나의 벽이다. 집의 억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내가 태생적으로 지닌 것이다. 벽은 낭창거리는 얇은 손을 뻗어 다가온다. 곧 저 손은 내 목을 조를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식은땀이 흐르고 구토감이 치밀어 오른다.


그때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기요."


"예?"


"예는 무슨,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담배 달라고요. 말보로 하이브리드 5mg."


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카운터 뒤에 빼곡한 담배 중 진한 하늘색의 담뱃갑을 꺼내 건넸다. 카운터에는 미리 올려둔 라이터와 초콜릿우유가 보인다.


"6100원입니다."


손님은 대답 없이 카드만 건넸다. 나도 대답을 바란 것이 아니었기에 서둘러 계산만 했다. 손님이 떠나고 미뤄둔 한숨이 터져 나왔다. 뜨거운 숨과 함께 현실이 밀어닥쳤다. 나는 부평역 인근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최근 집에서 쫓겨나 자취를 시작했고, 자취방은 학교 앞 지하철역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3층짜리 낡은 연립주택의 꼭대기 층이다. 하수관을 타고 손가락만 한 바튀벌레가 기어오르고, 취객의 고성이 적나라하게 들리는 허름한 원룸이다. 보증금 500에 월세 20. 원래는 월세 30이지만 학교까지 거리도 애매하고 건물도 낡아 세입자가 없어 집주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낮춘 가격이다.


현실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온다. 나는 가난하고 친구도 없고 수업을 따라가지도 못하는 열등한 인간이다. 만성 피로에 찌들어 푹 파인 눈을 가졌고 매일 라면만 먹어 팔다리가 가늘다. 볼품없는 인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어 다녀야 하는 시궁쥐 같은 인간. 모두가 나를 피한다. 드물게 대화를 나누던 경모도, 정교도 방학이 되자 연락이 끊겼다. 이렇게 조용히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찾지 않겠지. 그녀도 나를 잊겠지. 아니, 애초에 나라는 존재를 인지한 적이나 있을까?


누군가 다시 말을 걸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디 갔었어?"


현지누나다. 오랜만에 보지만 여전히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차이점이라면 이전보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잘 지내셨어요? 방학이라 잠시 집에 갔다 왔어요."


현지누나는 언제나 그렇듯 캔커피와 컵라면을 카운터에 올려놓으며 누구도 물어보지 않은 말을 했다.


"나도 잠깐 집에 갔다 왔어. 동생 보고 오려고. 원래 이 일에는 휴가 같은 게 없지만 내가 워낙 잘 나가서. 가게 옮기겠다고 우기나까 보내주더라."


누나는 쾌활하게 말했지만 긴 머리로 덮은 목덜미에 옅은 멍자국이 보였다. 나는 짐짓 모른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는 할 말이 있어 보였다.


"2150원입니다."


누나는 옷차림만큼이나 화려한 지갑을 열어 현금을 꺼냈다. 나는 잔돈을 거슬러주었다. 우리는 그런 사이다. 친밀하다고 할 수는 없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사이. 서로의 삶에 끼어들어서는 안 될 평행선이다. 누나는 계산이 끝났음에도 머뭇거리며 떠나지 않았다. 괜히 캔커피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작은 한숨을 쉬며 물었다.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아니... 별 일은 아니고... 혹시 언제 끝나? 오늘 시간 괜찮아? 아니면 다음도 좋고.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


누나는 그렇게 내 삶에 갑자기 끼어들었다. 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대는 사이 누나는 멋대로 약속을 잡았다.


"내일 저녁 7시에 부평에서 만나자. 편의점 앞에서 보는 게 너도 편하지? 술값 내라고는 안 할게 동생뻘인 애한테 얻어먹을 수는 없으니까. 부담 갖지 말고 대충 입고 나와. 알겠지?"


현지 누나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갑작스로운 상황에 얼이 빠져있을 때 이번에는 박 씨 아저씨가 찾아왔다. 그는 여전히 지폐를 바꿔달라 요청하며 닭꼬치를 건넸다. 어느새 새벽 2시가 넘었다. 박 씨 아저씨는 돈을 건네받고 잠시 나를 바라본 후 냉장고로 걸어가 박카스를 하나 가져왔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져 만 원짜리 한 장을 건넸다.


"너 먹어라. 잔돈은 됐다."


아저씨는 대답할 기회도 주지 않고 현지 누나가 그랬던 것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이상한 하루다. 그 뒤 만취한 손님을 몇 명 받고, 사장 아주머니에게 인수인계를 한 후 집으로 돌아와 누웠다. 피곤이 몰려오며 눈이 감겼다. 아주 오랜만에 경찰도, 검시관도, 탐정도, 히어로도, 빌런도, 그리고 그녀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 찾아오는 잠에 몸을 맡겼다. 7시 현지 누나를 만나려면 5시에는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할 일을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손에 꼽을 정도로 편안한 잠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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