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시 즈음 편의점 앞으로 갔을 때 누나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누나는 평소의 화려한 옷차림과 다르게 통이 넓은 청바지와 검은색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화장도 진하지 않았고 언제나 치렁거리던 밝은 탈색머리는 뒤로 가지런하게 묶여있었다. 누나, 하며 부르자 그녀는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그 웃음을 보니 심장이 내려앉는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는 이 감각을 알고 있다.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 성인이 되자마자 담배를 피웠을 때, 그 외에도 수없이 찾아온 이 감각은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감각이다. 이건 죄책감이다.
하지만 내가 왜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 수 없다. 나는 태연한 척 걸어가 누나에게 말을 걸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죄송해요."
"으응, 아직 7시 안 됐어. 내가 빨리 온 거야."
누나는 나를 끌고 술집으로 향했다. 편의점 근처에 있는 곳으로 평소 술 취한 사람들이 무더기로 나와 담배나 숙취해소제를 사서 돌아가던 주점이다. 주민등록증을 검사하고 구석 자리에 앉아 소주 한 병과 잔 두 개를 부탁했다. 누나는 내게 못 먹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고 안주를 주문했다. 누나는 소주를 잔에 따르고 손을 뻗어 눈앞에 두었다. 나도 그녀를 따라 잔을 들고 그녀의 잔과 부딪혔다. 씁쓸하고 역한 냄새가 입안에 가득하다. 진한 알코올 냄새가 싫어 숨을 참고 삼키느라 숨이 밭다. 누나는 익숙하다는 듯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었고 나는 기본 안주로 나온 튀긴 건빵을 집어먹었다. 만남부터,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다. 술집에 가본 적이 드문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누나는 이를 익숙하게 해낸다. 초보자인 나를 데리고도 거침이 없다.
우리는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이전의 행동을 반복했다. 누나는 물로, 나는 건빵으로 입을 헹궜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며 긴장된 몸이 조금씩 풀어졌다. 누나는 나와 다르게 끄떡없어 보였다. 나는 물로 텁텁해진 입을 적시며 먼저 말을 건넸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그러나 술이 들어가기도 했고, 아까 느꼈던 죄책감의 여파가 남아 다시금 벽이 돌진할 것 같았기에 무슨 말이라도 뱉어야 했다.
"보자고 하신 이유가 뭔가요?"
누나는 손에 턱을 괴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술 한번 마시고 싶기도 했고."
나에게 묻고 싶은 게 뭘까. 나는 그녀에게 답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누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일, 예를 들어 술집에 들어가 술을 마시거나 만남을 권유하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해낸다. 나 같은 열등 인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사람인 것이다. 대학 이야기도, 남자에 대한 이야기도 시간을 압축하여 살아온 그녀가 나보다 훨씬 잘 알 것이다. 누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겨먹은 놈인걸 어쩌겠는가.
"제가 알려드릴 게 있을까요?"
누나는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며 웃었다.
"너 친구 없지."
그녀의 단언하는 듯한 말에 얼굴이 달아오른다. 친구가 없다는 말은 사실이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그래 보인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직접 들으니 타격이 상당하다. 굳이 부정할 이유는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물어볼 게 있다는 거, 그거 핑계야. 그냥 너랑 술 마셔보고 싶었어."
누나는 술잔에 자작을 한 후 입에 털어 넣고 말을 이었다.
"나는 술 마시는 거 좋아해. 술을 마시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보이거든. 술에 취해서 평소보다 솔직해지는 것도 있지만, 그것보단 그 사람의 습관 같은 게 두드러져. 부주의해진다 해야 하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순간이 잦아지고, 식탐이 많은 사람은 안주빨을 세워. 평소에 말 수가 적은 사람은 술이 들어가면 대화가 끊길까 봐 쓸데없이 말을 걸어. 누구처럼 말이야."
누나는 병을 들어 내 잔을 채워주었다. 3분의 2 정도 채운 후 자기 술잔도 채웠다. 우리는 잔을 맞부딪히며 건배를 했다. 누나는 술을 입에 털어 넣고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물어보고 싶은 건 많지. 대학 생활이라든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세계의 이야기잖아. 평생 공부랑은 담을 쌓고 살았더니 대학은 꿈도 못 꾸겠더라. 게다가 동생 학비에 부모님 생활비도 대야 하니 일을 그만둘 수 없어."
내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는지 누나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런 표정 하지 마. 걱정해 주는 건 고맙지만 나는 이 생활이 꽤 마음에 들어. 진상 부리는 아저씨들이 귀찮기는 하지만 돈도 많이 벌고 배우는 것도 많아. 이를테면 티 나지 않게 술 버리는 방법 같은 거?"
현지 누나는 그렇게 말하며 빈 술잔을 들어 고개를 돌리고 마시는 척을 했다. 그 모습이 퍽 우스워 나는 안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더라. 부럽기도 하고. 내 주변에는 대학 다니는 애가 없거든.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업계에서는 다들 자기 이야기를 숨겨. 다시 돌아갈 세계를 만들어 놓는 거지. 정상적으로 돌아간 아이는 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우리는 술을 한잔씩 더 따르고, 건배를 하고, 입에 털어 넣었다. 술기운이 오른다. 누나는 소주를 한병 더 시켰다. 누나와 함께 있는 이 공간이 편해지기 시작했다. 벽도 오늘따라 잠잠하다.
현지 누나는 나와 다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가 교차할 일은 없어야 했다. 수많은 관계 중 가장 흔하고 깨지기 쉬운 관계니까.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세계를 간직한 채 여기에 있다. 눈을 마주치고 술잔을 기울이고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누구보다 친밀한 사이처럼. 술의 마력 때문인지, 아니면 서로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없는 사이기에 가능한 것인지 모르겠다. 누나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누나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했다. 나는 잠시 담배를 피우고 온 누나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21살이에요."
"어리네."
"누나는요?"
"여자 나이를 물어보는 건 실례인데."
"죄송해요."
"스물여덟."
"어리네요."
"고마워."
우리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눴다. 누나는 내 대학생활을 물어보았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을 들려줬다. 재미없고 꽉 막힌 곳이라도. 누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말고 어떤 일을 해봤는지 물어봤다. 나는 학원 일을 들려줬다. 원장이 돼먹지 못한 놈이었고 시급도 짰다고. 누나는 나에게 여자친구가 있는지 물어봤다. 나는 한 번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아직 섹스를 해본 적도 없다고 말했다. 농담이었다. 하지만 순간 수치심과 죄책감이 밀려들어 얼굴이 달아올랐다. 벽이 춤을 추며 예의 그 가느다란 손을 뻗는다. 조금 대화를 나눴다고 들떠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목구멍에서 역겨운 알코올 냄새가 솟아오른다.
누나는 말이 없었다. 누나와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는다. 목덜미가 뜨겁다. 잠시간의 침묵이 나를 사정없이 뒤흔든다. 나란 놈은 역시나 이렇다. 어머니의 말대로 똑 부러지게 하는 것도 없고, 누군가를 편안하게 만들어주지도 못한다. 사람들이 주변에 머무르지 않는 이유가 있다. 벽이 날아와 목을 조른다. 숨이 막힌다. 조그마한 목구멍의 틈새로 알코올이 고개를 치켜든다. 머리가 어지럽다. 숨이 막히고 입가에 하얀 거품이 맺힌다. 그때 누나가 내 머리에 손을 얹었다. 벽지가 물러나고, 목구멍이 열린다.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나는 고개를 들어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나를 보며 웃었다. 아, 누나에게서 '그녀'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래, 위로받았구나. 나는 '그녀'에게, 그 따스한 웃음과 작은 관심에 용서를 구했던 것이다. 그 웃음의 기억이, 아직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던 것이다.
나는 누나를 따라 웃었다. 어느새 탁자 위에는 술병이 가득했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메슥거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누나는 2차를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누나가 결제하려 했지만 나는 내가 내겠다고 한사코 우겨 2차부터 누나가 내는 것으로 했다. 술에 취해서인지 바닥이 나를 향해 올라온다. 벽은 제자리에서 너울너울 춤을 춘다. 하지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밤거리를 수놓은 불빛들이 번져 소용돌이친다.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 싸우며 소리치는 소리, 골목에서 구역질하는 소리가 한데 어우러졌다. 나는 그제야 거리에 속한 기분을 느꼈다. 편의점 유리벽으로 갈라졌던 세계에 비로소 들어섰다.
누나는 가볍게 내 팔에 자기 팔을 걸었다. 부드럽고 물컹한 촉감이 팔에 닿는다. 팔에 온 신경이 집중되고 몸이 빠르게 뻐근해졌다. 나는 태연한 척을 하며 누나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욕정을 보이지 않으려 부단히 애써야 했다. 누나가 나를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누나의 머리카락에서 멜론 향기가 났다. '그녀'의 상쾌하고 달콤한 향기와는 또 다르다. 그녀를 생각하니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뻐근한 아랫도리도 가라앉았다. 그리고 가슴께의 뻐근함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