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가. 그녀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연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관계인가. 아니, 연인은커녕 친구 사이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조차 0에 수렴한다. 대화는 고작 체조실에서 나눈 게 전부다. 그녀는 내 이름을 듣기 전에 친구와 떠났으니 이름도 모를 것이다. 학번도 나보다 높았으니 다음 학기에 만날 수 있을 리도 없다. 2학기에는 아직 같은 캠퍼스에 있으니 오다가다 한 번쯤 마주치겠지만 나를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내년이 되면 그녀는 3학년이 되어 안양 캠퍼스로 떠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스쳐가는 인연으로 남는 것이다. 서로의 세계가 부딪힐 일 없는 그야말로 남.
혼자 있을 때 눈을 감고 그녀를 생각하며 우연히, 운명의 바람이 불어 우리가 남긴 각자의 잔향을 서로에게 전해주지는 않을까 망상하고는 했다. 그러나 눈을 뜨면 칙칙한 곰팡이로 가득한 벽이 다가온다. 그럼 나는 현실을 자각하고 시궁쥐처럼 사람의 눈을 피해 늦은 밤에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간다. 술기운에 달아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었다. 환상적으로 느껴지던 밤거리의 열기가 도망갔다. 걸을 때마다 위액과 뒤섞인 알코올이 찰랑대며 불쾌한 포만감을 만들어냈다. 배가 찼다. 팔에서 느껴지는 누나의 가슴이 밀랍인형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나는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며 누나를 슬쩍 밀어냈다. 다행히, 누나는 대수롭지 않게 나를 지나쳐 앞장서 갔다.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이 스멀스멀 발목을 타고 기어오른다. 이런, 다시 벽들이 춤을 춘다. 예의 그 불쾌하고 끈적거리는 움직임으로 다가온다. 화려한 불빛과 소음이 섞여 마르지 않은 유화가 흘러내리는 것 같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는 내가 멋대로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나는 어떠한가? 누나는 현실이다. 누나는 여전히 내 앞에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이끈다. 그럼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나는 시궁쥐, 깔아뭉개지지 않도록 눈치를 살피며 도시의 표면을 부유하는 찌꺼기다. 한번 찾아온 부정적인 생각은 나를 자꾸만 심연으로 끌어간다. 벽이 앞을 가로막고 춤을 춘다. 거대한 미역줄기를 보는 것 같다. 이제 나는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여기에 못 박혀 굳어가야 한다.
그때, 따뜻한 손 두 개가 벽을 뚫고 들어와 양 볼을 붙잡는다. 누나다. 현지 누나다. 그녀 앞에서 미역줄기 같은 벽은 힘을 가지지 못한다. 나는 그녀의 손길과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뭐 해?"
"잠시 어지러워서요. 취했나 봐요."
누나는 내 볼을 놔주지 않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얼굴을 살폈다. 그게 약간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했다.
"얼굴도 안 빨갛고, 눈도 안 풀렸는데... 원래 취한 태가 안 나는가 보네?"
나는 나의 어두운 면을 보이기 싫어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럼 집에 가서 마시자. 우리 집에는 같이 사는 언니가 있어서 안되고, 자취한다고 했지? 너희 집으로 가자."
지금 내 집으로 온다는 말인가? 나의 수치와 어두움과 저열함으로 가득한 소굴로? 나는 필사적으로 변명하며 고개를 저었다.
"청소도 안되어있고, 둘이 있기에는 좁아요. 누나 사는데에서 멀기도 하고요. 집에서 요리도 안 해서 안줏거리도 없어요."
"그게 어때서? 나 청소 잘해. 치우면 둘이 앉을 공간을 나오겠지. 안주야 뭐, 시켜 먹으면 그만이고."
누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는 핸드폰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했다. 그리고 곧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내일은 늦게 나가는 날이라 괜찮아. 자고 갈게. 왜, 불안해? 여자가 집에 오는 게 처음이라?"
나는 더 이상 누나를 밀어낼 수 없었다. 변명거리도 시원찮을뿐더러 누나는 한번 마음먹은 것을 쉽사리 바꾸지 않을 성격인 듯싶었다. 사람에 익숙하지 않은 나라도 그건 알 수 있다.
"그럼 가요."
침대 밑에 박힌 휴지덩어리를 누나가 발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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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럽네."
방에 대한 첫 감상이다.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 한계까지 압축해 이제는 쓰레기를 뱉어내는 쓰레기통, 하수구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싱크대까지. 애초에 누군가를 들이려는 목적으로 생활하는 공간이 아니었기에 관리를 소홀히 했다. 혼자 쓰는 공간인데 더러우면 뭐 어떠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나의 소굴에 손님이 찾아왔다. 나름 정리를 한다고는 했는데 누나의 적나라한 말을 들으니 '어지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 과거의 내가 밉다. 나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옷가지를 대충 세탁기에 던져두고 쓰레기통을 다용도실로 옮겼다. 누나는 손님의 본분을 잊고 정리를 도왔다.
"조명도 갈아야겠어. 엄청 깜빡거리네."
그에 대답하듯 조명이 두어 번 깜빡였다. 저 조명 때문에 집안 분위기가 한층 더 음산했다.
"나중에요. 나머지는 제가 할 테니 앉아계세요."
누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연신 찬장이며 화장실이며 문을 열어젖히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남자애들은 이게 문제야. 엄마가 다 해주니까 생활력이 너무 떨어진다니까. 너도 집에서 엄마가 다 해주시지?"
"아, 네, 뭐..."
"그럴 줄 알았어. 하긴, 공부만 하던 아이니까 더 심하겠지. 공부만 하면 생활력이 떨어지는 건 남자나 여자나 똑같지만 남자애들이 더 심해."
누나는 침대 아래 휴지더미를 기어이 발견하곤 행거를 분해한 막대기로 쓸어 쓰레기통에 버리며 말했다. 쓰레기통은 그 더러운 쓰레기는 받지 않겠다는 듯 다시 뱉어냈다. 휴지들의 정체를 알고 있을 법도 한데, 누나의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이 이상 파헤쳐지면 가뜩이나 바닥인 존엄성이 위태로울 것 같아 누나를 반강제로 앉히고 앉은뱅이책상을 꺼내왔다. 하늘색 책상에는 세계전도가 그려져 있다. 집주인이 이제 쓸 사람이 없다며 버리려고 내놓은 것을 밥상으로 쓰기 위해 들고 온 녀석이다.
"이거 귀엽다. 우리 막내도 이런 책상 제일 좋아했는데."
누나는 손으로 책상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눈에 옅은 아련함이 어렸다.
"술은 있어요. 뭐 드실래요?"
"안주는 됐고, 술이나 마시자. 배불러서 더 이상 안 되겠어."
나는 찬장에서 종이컵을 꺼내 책상에 두었다. 종이컵이 가린 대한민국이 공교롭다. 누나는 술을 한잔 털어 넣더니 인상을 썼다. 미간에 옅은 주름이 잡혔다.
"혼자 사는 거 외롭지 않아?"
외로움이라, 분명 외로움이라든가, 고독이라든가 그런 류의 감정이 찾아올 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적막이 유발한 것들을 사랑한다. 혼자 있지 않으면 자꾸만 벽들이 춤을 추며 다가온다. 아르바이트는 버틸 수 있다. 아르바이트 도중에 나를 찾는 사람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아닌 카운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강의에서, 집에서, 거리에서의 관심은 힘들었다. 그들은 나를 명확하게 바라보며 요구했다. 대답해라, 밥 먹어라, 방 치워라, 공부해라... 그런 요구를 받으면 어김없이 벽이 춤을 춘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기질이 있기는 했지만 요새, 정확히는 부모님과 대거리를 벌인 후 증상이 심해졌다. 웃긴 점은 그녀나 현지 누나는 괜찮다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그녀들의 관심을 원했다. 그녀들과 대화하고 싶고, 그녀들에 대해 알고 싶고, 그녀들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참으로 이기적이고 불합리한 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에 익숙한 통증이 찾아온다. 나는 누나의 말에 겨우 답했다.
"괜찮아요. 잠만 자는 곳이라."
"공부하는 건 어때? 나 대학생활은 안 해봐서 엄청 궁금해. 고등학교도 제대로 안 다녀서 대학이나 공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라."
"별거 없어요. 그냥 수업 듣고, 리포트 작성하고, 조별과제하고 그런 거죠. 아, 술자리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는 잘 안가서 모르지만."
"기왕 들어간 거 성실하게 다니지 그래? 아르바이트도 그만두고. 아깝잖아. 공부 잘했을 텐데."
"부모님과 싸우고 멋대로 나온 거라 돈이 없어요. 휴학하고 다른 일 해볼까 생각하고 있기는 해요. 공사판이라든가."
누나는 네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긴, 이런 비루한 몸으로 공사판이라니, 약값이 더 나올터였다.
"그러지 마. 가끔 손님으로 그런 사람들 받는데 진짜 매너 없어. 팁도 안 주고. 나는 너 그렇게 안되었으면 좋겠어."
누나는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고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나도 덩달아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환경은 중요해. 환경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지만 환경은 사람에게 자기와 같은 색의 옷을 입혀. 어떤 사람이라도 환경에 따라 변해. 당장을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러니까 하지 마. 너는 나 같은 사람이 되지 마."
"누나 같은 사람이 뭔데요?"
"뭐, 알잖아. 꿈보다는 살기 위해 돈을 버는 그런 사람.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해 살고, 세상에서 사라져도 그 누가 궁금해하지도, 대신 화내주지도 않는 사람. 공사판에 다니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야. 술집에 드나든다고 그런 사람이라는 것도 아니고. 말주변이 없어서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무튼 하지 마 그거."
그렇게 말하는 누나는 슬퍼 보였다. 나는 위로를 해주고 싶어 아무 말이나 건넸다.
"누나는 좋은 사람이에요."
누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 넌 나를 몰라."
"조금은 알아요."
"그럼 말해봐."
나는 목을 가다듬으려 물을 한 모금 마셨다.
"28살, 여자, 인천에 살고 대화를 잘한다."
"그리고?"
누나가 재촉했다. 나는 홧김에 소주를 병째로 들이키고 말했다. 입가에 술이 흘렀다.
"예뻐요. 화장을 옅게 한 게."
누나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며 바닥을 굴렀다. 늦은 바에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연립주택에서 금기였지만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라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예뻐? 어디가 예쁜데?"
누나는 예의 그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냥요... 예쁘다고요."
나는 부끄러워 답을 피했지만 누나는 몸을 내게 기울이며 계속 물었다.
"피하지 말고 말해봐."
그때 스쳐가며 누나의 눈이 보였다. 슬픔을 가득 안고, 애써 버티는 눈이, 그 눈이 더없이 맑고 애처로워 나는 순간 영혼을 빼앗긴 듯 굳어버렸다.
"눈이요... 눈이 제일 예뻐요."
누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눈을 마주치고 서로를 한참 응시했다. 이윽고 누나가 입을 열었다. 충격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나랑 섹스하자. 내가 알려줄게."
"네?"
"알려준다고. 나 너랑 하고 싶어."
사고가 마비되었다. 아무 말 없이 굳어있는 나를 향해 누나가 다가왔다.
"돈 안 받을 테니까 겁먹지 말고."
"누나! 그런!"
"농담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