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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10)

by 전창훈

그 뒤로 누나를 볼 수 없었다. 누나는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구태여 그녀를 찾지 않았다.

그즈음 다시 아르바이트를 늘려 시간이 없었고, 다시 기숙사에 돌아가는 바람에 생활에 제약이 있었던 탓이다. 기숙사의 답답함과 그 오르막길이 싫어 자취를 시작했건만, 다시 기숙사로 돌아오고 말았다. 자취 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난 것도 한몫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작은 그 방이 더 이상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지 누나와 밀회 이후, 내 심경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후련하다거나, 성장했다거나 하는 등의 멋들어진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정사 이후 몰려온 해방감과 강렬한 자극에 의한 탈력감이 몸을 지배해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오는 배덕의 기운과 무기력함은 진창에 빠진 발을 진흙이 놓아주지 않는 것처럼 나를 끈덕지게 옭아맸다.


카운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으면 누나가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다. 사라졌던 게 없던 일인 듯 은근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캔커피와 컵라면을 올려놓을 것 같다. 그날 밤의 정사가 없던 일인 듯 계면쩍은 미소도, 부끄러움도 없이 다가와 머리에 손을 얹어 쓰다듬어줄 것만 같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번화가의 소음과 후덥지근한 여름 냄새를 몰고 들어오는 사람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취객뿐이었다.


새벽 3시가 넘어가자 손님이 뜸해졌다. 나는 잠시 카운터를 비우고 담배와 청소도구를 챙겨 거리로 나섰다. 행인은 줄었지만 번화가 특유의 들뜬 열기는 여전했다.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와 전봇대 아래 질펀하게 눌어붙은 토사물을 뒤로하고 사람들이 떠난다. 나는 청소도구를 내려놓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삽시간에 시야를 덮었다. 연기와 뒤섞이며 빛무리가 달려든다. 그 희끄무레한 빛은 나를 거리로 이끈다. 손목을 감싸고 어깨를 휘감고, 이내 등을 떠민다. 그리고 다시 벽이 달려든다.


벽은 위협적으로 쉿쉿 소리를 내며 빛을 내쫓는다. 곧 빛은 연기와 어울려 한 여자의 형태를 만들어낸다. 현지 누나다. 벽은 부리나케 달려와 앞을 가로막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빛도, 연기도, 쓰레기도, 토사물도. 나는 담배를 끄고 몸을 돌려 청소도구를 집어 들었다. 벽은 흡족하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경박한 웃음을 보인다. 나는 대충 청소를 마무리하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벽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굳건하게 나를 노려다 본다. 나는 그걸 힐끔 바라보고는 문을 닫았다.


"갈 생각도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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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빠르게 흘러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 퇴색될 줄 알았던 누나와의 일은 오히려 점차 뚜렷하게 나를 옭아맸다. 성욕이 잉태한 끔찍한 죄의 징수인 것일까. 아니면 뜨겁게 달아올랐던 그날의 열정이 빚은, 이제는 차게 식어버린 도자기인 것일까. 영혼이 육체에 유착되지 않고 부유하는 기분이 계속된다. 누나를 생각하면 언제나 '그녀'도 함께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녀와 함께 길을 걷고, 손을 잡고, 뜨겁게 포옹하고 싶은가. 물론이다. 절실하게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알 수 없는 감정만 휘몰아치는 와중에도 개강은 다가왔다. 벌써 9월이 다 되어간다. 늦여름의 발악이 애처롭게 땅을 덮이고 있었다. 조용하던 교정에는 슬슬 사람들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기숙사에도 사람이 들어와 하나 둘 방이 채워졌다. 나도 방학 동안 머물던 방을 정리하고 배정받은 방에 들아갔다. 룸메이트는 아직이었다. 나는 최대한 룸메이트의 공간을 건들지 않고 짐을 풀었다.


한참 짐을 풀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는 내 허락도 구하지 않은 채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정교였다.


"어라? 네가 내 룸메였어?"


그는 적잖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기숙사의 방배정은 1년 주기로 이뤄진다. 중간에 결원이 생기지 않는 한, 그리고 새로 입사하는 학생이 생기지 않는 한 구성원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숙사 들어오는 거야? 자취한다고 했던 거 같은데."


"너도 자취하지 않았어? 기숙사 나가고."


"아, 방학에만 잠깐."


우리는 어색한 미소를 교환하며 쭈뼛거렸다. 문 밖에서 정교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개강 전에 만남을 가지기로 약속했나 보다.


"짐 두고 갔다과, 술 많이 마시고 돌아와도 돼. 신경 안 쓰니까."


정교는 나의 말에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는 짐을 침대 발치에 두고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너무 늦으면 너도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짐 푸는 것에 열중했다. 아니, 열중하는 척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교가 말이라도 걸 기세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을 한번 바라보고,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이를 반복했다. 어색한 기류에 안전부절 못하는 기색이 더해지자 답답하고 불편했다. 다시, 벽이 움찔거린다. 정교는 상냥한 사람이기에 내가 불편하거나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을 보이면 당장 달려들어 한바탕 호들갑을 떨어댈 터였다. 그럴 수는 없다. 내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다. 아니, 들켜서는 안된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먼저 물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정교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잠시 휴대폰을 만지더니 입을 열었다.


"저녁에 약속 있어?"


"응?"


"별일 없으면 우리랑 놀래?"


그는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게 분명하다. 너무나 밝고, 너무나 포용력 있는 사람이다. 나와는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울려서는 안 된다.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지내야 한다. 한 공간을 공유하지만 서로 겹치지 않는, 마치 팔레트에 짜인 물감처럼. 그런데 지금 그가 내 영역에 들어오려 한다. 나를 끌어들이려 한다. 거절해야 한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말은 나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그래,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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