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째서 여기에 있는가. 어쩌자고 그의 제안을 수락했을까. 어스름한 조명 사이로 술잔을 마주치는 사람들이 보인다. 나는 화장실과 가까운 구석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는 술잔과 안주가 가득했고, 사람들은 저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모습에 압도당했다. 정교는 괜찮다고 만류하는 나를 굳이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이름도, 얼굴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었다. 그저 어색한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고립되는 기분이었다. 사람들은 저들끼리 웃고 떠들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나는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 수 없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것처럼, 그들의 웃음소리는 나에게서 멀어져만 갔다.
"혹시... 술 못 마셔요?"
내 옆에 앉은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술은 내게 또 다른 불안 요소였다. 술에 취하면 통제력을 잃을까 봐 두려웠다. 혼자 마시는 것은 괜찮다. 필름이 끊기더라도 오롯이 혼자 감당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럼... 음료수라도 시켜줄까요?"
여학생의 친절한 제안에 나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동시에 더욱 움츠러들었다. '나는 역시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의 취기가 오를수록 나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는 굉음처럼 느껴졌고,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벽이 다시금 몸을 일으킨다.
저 사람들이 나를 비웃고 있어... 쟤는 왜 저렇게 혼자 겉돌아? 정교가 데려온 애 이상해... 근데 쟤는 어디 과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소리들에 나는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의자가 끌리는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된다.
"저...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나는 황급히 술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에 닿자 조금 진정되는 듯했다. 하지만 불안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나는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숨을 고르고, 다시 한번 심호흡을 했다. 벽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나도 고개를 들어 벽을 마주 본다. 벽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기울였다가 다시 바로 세운다. 나는 그 광경을 한참 바라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술집 안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나는 다시 돌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곳은 나에게는 너무나 버거운 공간이었다. 나는 그 길로 술집을 등지고 나와 홀로 거리를 걸었다.
자기 계발서나 에세이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남들처럼 될 필요는 없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된다.'
'나에게 상처를 남기는 일들은, 동시에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앞으로도 불안과 싸워나가겠지만, 걱정 마라. 나만의 색깔을 가지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불안은 마치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속삭임은 귓가에 맴돌았다. 나는 영원히 이 불안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벽이 졸졸 따라온다.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녀석이.
언제부턴가 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벽은 어렸을 때부터 내 곁을 맴돌았다. 항상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에는 잠잠하다가도 어머니가 매를 들었을 때나, 아버지가 밥그릇을 던질 때나, 선생님께 뺨을 맞을 때나, 같은 반 아이들이 나를 둘러싸고 무언가라고 소리칠 때면, 어디선가 벽이 나타나 나와 그들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벽은 매를 대신 맞아주었고, 밥그릇을 막아주었으며, 뺨을 때린 선생님 뒤에서 나타나 손가락으로 선생님의 머리에 도깨비뿔을 만들어주었다. 벽은 소중한 친구였고 고마운 보호자였다.
그 벽이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체육수업에서 달리기를 하는 날이었다. 아마 가을 운동회 계주 선발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충 달렸다가는 건장한 체육 선생님이 불호령과 함께 매를 내려칠 테니 몸을 사릴수는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자면, 사렸어야 했다. 호각 소리에 맞춰 튀어나간 나는 갑작스레 튀어나온 벽을 피하기 위해 몸을 뒤로 젖혔고 그로 인해 무릎, 발목 인대가 늘어났으며 바닥에 머리는 박는 바람에 뇌진탕으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신체적인 부상보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그 벽이, 나의 소중한 친구이자 보호자인 벽이 내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자각한 것이다. 기절하기 직전 어렴풋한 시야로 보인, 함께 달리던 옆 레인의 친구는 벽을 뚫고 달려 나갔다. 마치 애초에 그런 것 따위는 없었다는 듯.
그때부터 벽은 힘을 잃었다. 어머니의 세찬 매질로부터 몸을 날려 막아주지 못했고, 아버지가 날리는 밥그릇으로부터 나를 보호해주지 못했다. 선생님 뒤에서 아무리 뿔을 만들어도 뺨은 얼얼했다. 벽은 허상이다. 나만 보이는 환상이다. 하지만 이를 자각했음에도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관심을 주지 않아도, 세차게 발길질을 하며 사라지라 소리쳐도, 벽은 사라지지 않았다. 불안해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나타나 내 앞을 가로막고 비열한 웃음을 흘린다. 지금처럼.
"뭘 원하는 거야."
나는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다. 미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니,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니라 실제로 미쳐있는 게 틀림없다. 저런 벽이 눈에 보이는데 정상일리가. 벽은 여전히 몸을 흐느적거리며 나를 조롱한다.
그때, 벽을 찢으며 누군가 나타났다. 단발머리, 작은 체구, 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아직 통통한 볼살. 그녀다. 김예지,라고 했었나.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그녀가 나타났다. 나와 벽의 거리를 뚫고 그녀가 들어왔다.
"여기서 뭐해요?"
그녀의 주위로 빛이 퍼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