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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13)

by 전창훈

어둠이 짙게 드리운 기숙사 방, 희미한 달빛만이 창문을 타고 스며들어와 정교의 잠든 얼굴을 비추었다. 그는 술에 잔뜩 취해 비틀거리며 들어와 방금 침대에 몸을 던진 참이었다. 정교는 술주정이 섞인 잠꼬대로 연신 씨근대며 베개를 주먹으로 쳐댔다. 그리고는 머리가 아픈지 버려진 강아지처럼 애처롭게 끙끙댔다.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인 채 그가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어느새 술기운이 잦아들고 정교가 잠에 들었다. 방은 규칙적인 숨소리만 가득했다. 고요한 밤, 하지만 내 안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그녀에 대한 감정. 그 미지의 영역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한 채, 나는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문득 달빛에 정교의 일그러진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그도 사랑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있을까. 마치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손을 뻗으면 사라져 버리는 그림자처럼, 사랑은 언제나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가족도, 학교도, 그 누구도 속 시원히 알려주지 않았던 것.

어떤 이는 사랑을 책임감이라 했다. 책임져야 할 무언가가 생겨나는 순간, 비로소 사랑이 시작된다고. 또 다른 이는 따스함이라 했다. 가슴 한켠이 데워지는 기분,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하지만 나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책임감이란 무엇이며, 따스함이란 어떤 감정인지. 그 모호한 단어들만으로는 사랑의 실체를 그려낼 수 없었다.

문득 책에서 읽은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 누군가는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 아닌, 능동적인 행위라는 것으로 정의했다. 주고, 돌보고, 이해하고, 책임을 지는 것.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복합적인 행위라고 했다.

또 다른 사람은 사랑을 결핍으로부터 오는 갈망이라 했고, 오래된 책에서는 오래 참고 온유하며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 했다. 그들의 말은 마치 퍼즐 조각처럼 흩어져 있었다. 윤곽을 보여주는 듯하다가도 금세 흩어졌다.

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이 마치 작은 불씨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사랑은 각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는 것인지도. 책임감, 따스함, 헌신, 희생, 그 모든 것이 사랑의 단편적인 모습일 뿐, 진정한 사랑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거대한 감정의 파도일지도 모른다.

나는 오랜만에 내 안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한바탕 끌어 오른 후 소강상태에 접어든 마음은 조금 편안했다. 가만히 그녀와 누나를 떠올렸다. 가슴 한편에서 뭉클하게 따스함이 피어올랐다. 그녀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간절함이 떠올랐다.

동시에 가슴 깊은 곳에서, 그러니까 내 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보다 더욱 깊은 곳에서 나를 막아서는 비명이 들린다. 그 비명은 어린아이 같기도 했고 50대 여자 같기도 했고 60대 남자 같기도 했다. 나는 그게 듣기 싫어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대답 없는 질문만이 공허한 방안을 맴돌았다. 인간의 감정이란 얼마나 복잡하고 미궁 같은 것인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처럼, 감정은 언제나 내게 혼란과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갑자기 책에서 읽었던 사랑의 정의들이, 마치 오래된 지도처럼 낡고 쓸모없게 느껴졌다. 누군가의 말도, 다른 누군가의 말도, 오래된 책도, 지금 내 안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설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랑은 논리와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는, 그저 느껴지는 혼돈 그 자체였다.

어딘지 낯설어 보이는 정교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사랑은 존재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마치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예측할 수 없는 파도처럼, 사랑은 언제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때로는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로등 불빛은 마치 희미한 절망처럼 느껴졌다. 그래, 나는 아직 사랑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감정이란 당최 알 수 없는 것이기에, 사랑은 더욱 복잡하고 답답한 미궁 속에 갇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을지도 모른다.

나는 시선을 돌려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새 마음속,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들려오던 비명도 아스라이 멀어졌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만이 내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했다. 하지만 그 소음조차도 내게는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외면 속에서 점점 더 깊은 고독 속으로 침잠해 갔다. 내 곁에 있는 유일한 존재는 내 눈에만 보이는 환상 같은 벽. 그 벽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보호하는 동시에, 나를 영원히 고립시키는 감옥이었다.

벽 너머의 세상은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내 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치 심해 속 물고기처럼, 나는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잃어갔다. 누구에게도 닿을 수 없는 절망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독함. 그것은 마치 무거운 쇠사슬처럼 나를 옭아매고, 숨 막히는 고통을 안겨주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고독의 형상. 그것은 마치 검은 그림자처럼 내 주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 그림자를 떨쳐내기 위해 몸부림쳤지만, 그림자는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이 어둠 속에서 홀로 남겨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미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애썼다. 언젠가 이 어둠이 걷히고, 따뜻한 햇살이 나를 감싸 안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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