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등급 인간(15)

by 전창훈


매미 울음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찌른다. 뜨겁게 부풀어 오른 거리는, 일렁이는 숨을 거칠게 뿜어냈다. 녹아내린 아스팔트가 발끝에까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단지 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점착성이, 내가 지나온 삶의 궤적이, 나를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확실하지 않은 기억들, 잊히지 않는 장면들, 감추고 눌러놓았던 말들과 얼굴들이 땀보다 느리게, 공기보다 무겁게 따라붙었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질수록, 과거는 뒤에서 내 발목을 잡았다. 정교의 말이 이상하게 따뜻하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그 말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무언가가 있었다. 나는 그 무언가를 알고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벽이다. 그것은 말 한마디, 시선, 손끝의 떨림 따위로는 쉽게 무너질 수 없는, 아주 오래되고 낡았지만, 여전히 단단한 구조물이었다.

나는 그 벽 뒤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누구도 그 벽을 넘게 하지 않았다. 벽 또한 나를 지켜주는 법을 배웠고, 내가 자신을 넘도록 두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정교의 입에서 나로는 풋풋한 말은 어렴풋이 설레면서도, 나를 위협했다. 그 벽 너머에 가 닿고 싶다는 마음이 아스팔트처럼 뜨겁고 무겁게 달라붙었다.

나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쩌고 싶냐는 물음에 정교는 말끝을 흐렸다.

“사랑한다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야.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그래, 마냥 좋은 감정만은 아니야. 뭔가, 더 어렵고 처연하고 애틋한데 가끔 설레는 것. 그게 사랑이야.”


그 말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마치 머릿속 어딘가에 오래 잠겨 있던 문이 살짝 열린 느낌. 안쪽에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희미하게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그날의 누나를 떠올렸다. 말없이 나를 끌어안았던 얇은 팔과 뜨거운 열기. 밭은 숨소리와 나직하게 울리는 교성. 아무 의미 없었을지도 모르고, 이후 바람처럼 사라졌지만, 그리고 누나 역시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 밤, 나는 아주 잠깐 누군가의 안에 들어있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사랑일까? 아니면 사랑이라는 걸 흉내 내던 벽의 장난이었을까.


어느새 여름이 훌쩍 다가왔다. 매미는 한층 거칠게 울어댔고 짙은 풀 비린내가 가득했다. 나는 누나를 어떤 냄새로 기억하게 될까.


정교의 말은 벽에 부딪혀 그늘도 바람도 없는 날카로운 햇빛 속으로 퍼져나갔고, 나는 땀에 젖은 등허리를 곧추세운 채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녹아내린 아스팔트는 여전히 나를 묶어 놓았다. 다시금 벽이 나를 가로막는다. 더위가 아닌 내가 지나온 시간이 아스팔트를 녹여 나를 붙든다.

사랑받은 적 없는 어린 날의 기억, 이름조차 불러본 적 없던 교실, 시선 없이 스쳐 간 친구들, 말을 걸고 싶었던 누군가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멀어져야 했던 순간들. 그런 것들이 아스팔트 위의 거무죽죽한 끈적임처럼 내 발을, 나아가려는 순간을, 살고자 하는 의지를 조용히 질식시켰다. 한 걸음만, 단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달라질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다짐하고 발을 들어도 여전히 나는 아스팔트에 붙들리고 벽에 가로막힌다.

아스팔트는 여전히 뜨거웠고 그 위에 쌓인 시간은 내 발을 잡아당겼다.


벽의 존재를 믿고 살아온 만큼 정교의 말은 내게 질문이자 유혹이고, 경보음이었다. 현지 누나도 마찬가지다. 그녀 또한 그렇다. 그래도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내가 벽을 허물고 발을 떼어 사랑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저 멀리서, 아주 작고 희미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너무 멀고 흐릿해서 손을 뻗을 수조차 없지만 분명히 들리는 그 기척.


나는 지금 여름의 중심에서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벽에 균열이 생기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keyword
화, 목 연재
이전 14화9등급 인간(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