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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17)

by 전창훈

밤공기는 흐릿했다. 더위는 조금 가셨지만 축축한 열기가 아직 남아 있다. 편의점은 늘 그렇듯 무표정했고, 나도 그랬다.

2학기가 개강함과 동시에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다시 시작했다. 이유는 별거 없었다. 누군가를 피하고 싶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내가 숨어 지낼 공간이 필요했다. 이곳은 적당했다. 사람들은 지나가고, 나는 남는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일들이 반복된다. 뭘 느끼지 않아도 되는 시간, 뭘 말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


애석하게도 무채색의 공간과 다르게 나는 매 순간 처절하게 덧칠당하고 깎여나가고 있었다.


첫 강의가 끝난 뒤 깨달은 것은, 그녀는 나를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게 당연한 일인데도, 수업 내내 그녀의 눈에 띄지 않으려 했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괜히 건물 구석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하지만 그러면서 내 눈은 그녀에게서 벗어날 줄 몰랐고, 그녀가 하는 말을 들으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은 늘 조용했고, 나는 그 조용함에 빠져들어 바닥을 향해 천천히 가라앉았다. 질투가 나기 시작한 건, 어쩌면 그보다도 더 전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적도 거의 없는데, 내 마음은 매번 그녀가 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상기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혔다. 누군가 그녀와 웃고 있는 모습, 대화하는 모습, 옆에 앉는 모습 하나하나가 내 마음을 찢었다. 그러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이 마음을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밤의 고요 속에 숨었다. 바코드를 찍고, 계산대를 정리하고, 라면 진열을 다시 하면서 묻어두었다. 하지만 속은 텅 비었고, 매일 밤 조금씩 나는 무너져 내렸다. 그날도 그랬다. 밤 12시를 조금 넘긴 시각. 컵라면을 진열하며 멍하니 손을 놀리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삐이— 그 단순한 전자음이, 이상하게도 온몸에 퍼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녀였다. 그녀가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볼은 조금 붉었고, 발걸음은 살짝 흔들렸다. 취한 것 같았다. 그런데도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맑았다. 마치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꿈속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우습게 생긴 파란 캐릭터가 그려진 초콜릿우유를 하나 들고, 계산대로 천천히 다가왔다. 나는 숨을 고르지 못한 채 가만히 섰다. 움직일 수 없었다. 계산대 앞에 선 그녀는 조용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그 눈빛은, 어딘가 텅 비어 있었지만 동시에 가득한 것 같았다. 나는 애써 손을 뻗어 우유를 받아 들고, 기계처럼 바코드를 찍었다.

삑—

우유 하나. 1,200원.

그녀는 천천히 지갑을 열고,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냈다. 그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길었다. 그녀의 손끝, 그녀의 손등에 맺힌 미세한 땀방울 같은 게 눈에 들어왔다. 돈을 건네받고 거스름돈을 돌려주려는 찰나, 그녀가 말을 꺼냈다.


“저 아시죠?”


나는 듣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녀가 방금, 무슨 말을 한 거지? 나는 다시 그녀를 봤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느리고 작았다. 마치 힘을 내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그런 웃음.


“모르면 말고요,”


그녀는 덧붙였다. 가볍게,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그 순간, 나는 너무 많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부끄러움, 놀람, 혼란, 그리고… 기쁨. 아주 조심스레 다가오는, 희미한 기쁨. 하지만 동시에, 이건 무언가 잘못된 일이라는 감각도 스며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머릿속 어딘가가 진동했다.


아 이런, 다시 벽이 나타난다.


벽은 편의점 안, 냉장고 뒤편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나는 그것을 본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무형의 무언가. 그것은 말한다.


“네가 원하던 순간 아니었어?”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눈앞에 있다. 내가 그토록 상상해 왔던 모습으로. 하지만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녀는 초콜릿우유를 가방에 넣고, 다시 내 얼굴을 바라본다. 파란 대가리가 나를 비웃듯이 입꼬리를 쳐든다. 눈동자가 흔들린다. 어쩌면 그녀도 뭔가를 버티고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고개를 숙인다. 말 한마디 없이, 아주 작게. 고개를 숙인 채. 그녀는 그걸 알아차린 듯, 한쪽 입꼬리를 들어 보인다. 그리고 말없이 돌아선다.


벽이 나를 비웃듯 흐물거린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렇게까지 부풀면 언젠가 날아가버리고 말 텐데. 잔뜩 커져버린 머리에 누군가 바늘을 가져다 댄다. 찌릿한 고통이 밀려온다. 펑! 터진 건가? 뭔가 새어 나오는 것 같다. 피야? 아니면 바람인가? 벽에게 말을 걸어보지만 벽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춤을 춘다. 하늘하늘, 흐물흐물...


나는 밀려오는 짜증을 참으며 현실로 돌아오려 노력한다. 손을 내저어 앞에서 까불거리는 벽을 흩어놓는다. 벽은 사라지는 순간에도 비웃음을 멈추지 않고 흔들거린다. 그때 멀리서 아스라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들려온 건가? 그 목소리는 흐릿한 벽을 부수며 나의 영역에 스스럼없이 들어왔다.


그녀다. 그녀가 다시 내 앞에 서있다. 나는 형광등 불빛이 찬란한 광륜으로 보임을 애써 부정했다. 나는 영도당하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쩐 일로...?"


그녀는 내 눈을 뚫어지듯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여전히 그녀의 머리 위를 비추는 형광등의 불빛이 광륜으로 보여 자꾸만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언제 끝나요?"


"네?"


"끝나고 술 한잔 해요. 오늘이 아니면 다음에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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