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식, 밤에 자꾸 부스럭거려서 뭐 하나 슬쩍 보니까 손을 아래에 두고 왕복하더라니까. 미친놈인 줄 알았어. 같이 쓰는 공간에서 좀 참을 것이지. 정 급하면 화장실 가서 해결하던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씩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정교는 그런 내 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그러나 조금 걱정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읽을 수 있었지만 나는 애써 모른척하며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술잔이 돌고 다 같이 머리 위로 잔을 치켜들었다. 잔 부딪히는 소리가 퍼져나가며 귓속 깊이 울림이 파고들었다. 목이 불타는 느낌과 함께 속이 찌르르 울렸다. 여기저기서 싸구려 알코올을 애써 내뱉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현수가 이렇게 재밌는 놈인 줄 몰랐네. 그동안 계속 강의도 잘 안 나오고 술자리에 얼굴도 안 보여서 우리랑 어울리기 싫은가 보다 했는데, 지금 보니까 그냥 기회가 없었던 거였나 봐."
옆에서 누군가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누구더라. 낯이 익지만 이름은 모르겠다. 아마 같은 과 사람인가 보다. 어쩌면 학기 초에 어울려 어쩌다 함께 밤을 지새운 사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도저히 누군지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이어서 앞에 앉아 깔깔거리던 여자애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
"왜, 그래도 너네 학기 초에 자주 어울렸잖아. 같이 술도 마시고 맨날 모여서 담배 피우고. 친하게 지내던 거 아니었어?"
이쯤에서 나는 내 어깨를 친 남자가 같은 과이며 기숙사에 들어가기 싫어 동기들의 자취방을 전전했을 때 하룻밤 신세 진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그렇지만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애는 피식 웃으며 안주를 주워 먹었다. 할 말이 없는 눈치였다. 여자애도 굳이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다시 술잔이 오가고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말도 느려지고 눈도 풀려갔다. 나는 계속 이야기에 살을 붙여 떠들었고 정교는 그런 나를 여전히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나는 그의 눈빛이 어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자리가 파할때즘, 그러니까 사람들이 하나둘 탁자에 엎드리거나 사라질 때 즈음 정교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담배나 한 대 하러 가자는 모양이다. 나는 그의 부름이 마뜩잖기도 하고, 또 어딘가 두렵기도 하여 거절하려 했지만 속에서부터 치고 오르는 술기운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따라나갔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 떨어지는 재가 발끝에 쌓이도록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그 침묵에 괜스레 부아가 치밀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나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그에게 던졌다. 아니, 평소라면 애초에 말을 먼저 꺼내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무엇보다 술기운이 점점 올라와 과감해진 탓이리라. 그래, 전부 술 때문이다.
"불만 아니야."
정교는 뜬금없는 말에도 여전히 흩어지는 연기를 눈으로 좇으며 말했다.
"아까부터 불만 있어 보이던데? 내가 말할 때마다 계속 이상하게 웃고. 불만 있으면 말해.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불만은 아니고... 그냥 네가 바뀐 거 같아서 걱정되니까."
"걱정? 내가 바뀐 게 너랑 무슨 상관이라고 걱정이야."
정교는 마지막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 할 말을 신중히 고르는 듯 연기를 한참 동안 입에 머금고 있었다.
"기분 나빠하지 말고 들어. 바뀐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 너도 알겠지만, 이전에 네 모습은...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운 사람처럼 보였어. 이 말도 최대한 순화해서 표현한 거야. 굳이 직설적인 표현으로 네 기분을 더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가 몸을 돌려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시작했다. 흘려듣기 어려운 말이 나왔지만, 나는 뒷말이 궁금해져 대답하지 않고 살짝 시선만 피했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았어. 힘들어 보이지만 벗어나고 싶은 의지가 확고했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동기부여를 받기도 했어. 그것뿐이 아니야. 여자랑 말 한마디 제대로 나누지 못할 때는 아, 이 친구는 참 순수하구나, 내가 언젠가 잃어버린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고. 내가 챙겨줘야겠다는 그런 마음이 들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 갑자기 바뀌었어. 아까 말했지만, 바뀐 것 자체는 반길 일이야.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는 아니야."
"내가 어떻게 바뀌었는데?"
"들떴잖아. 그것도 너무. 아까만 해도 그래. 굳이 남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아도 충분히 분위기 좋았는데 한마디 거들려고 남의 깊은 사생활까지 들춰서 웃음거리로 만들었잖아. 내가 아는 너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야. 내가 틀려?"
틀리다면 틀리고 맞다면 맞다. 나는 추잡한 인간이기에 언제나 그런 상상을 했다. 나만이 간직한 은밀한 비밀을 풀어 웃음을 사는 것, 그렇게라도 환심을 사는 것. 그렇기에 나의 음침한 시선과 더러운 상상은 언제나 상수였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변수였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내게 나는 하지 않기를 택했다. 그래야 변수가 불러올 또 다른 변수를 줄일 수 있으니까. 벽이 나를 가로막지 않으니까. 정교의 말이 나를 압도한다. 다시 벽이 스멀스멀 기어올라온다. 아, 지겨운 벽. 개 같은 벽
"그래서? 나는 그러면 안돼?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야?"
나는 발끝으로 치솟아 오르는 벽을 애써 누르며 정교에게 대신 화를 분출했다.
"내가 순수해? 열심히 살아? 알지도 못하면서 왜 지랄이야. 그래, 나 사회부적응자야. 술 안 들어가면 니들처럼 말하는 것도 어렵고 선이 어디까진지 몰라서 조금 흥분하면 아무 말이나 막 떠들어. 그리고 창피해서 기어들어가지. 그래, 나 여자랑 말도 못 하는 놈이야. 여자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못 하고 횡설수설해. 그래서 뭐. 그래서 뭐!"
문득 고개를 들어 정교를 보자 처음 보는 나의 분노가 당혹스러운지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뒤로 애써 찍어 누르던 벽이 다시금 솟아올라 나를 잔뜩 비웃고 있었다. 정교는 이내 표정을 갈무리하고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야. 간섭이라 느꼈다면 사과할게."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나는 거울처럼 내 모습을 비춰주는 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이 아니면... 다음에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