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실 문 앞에 선 순간, 손끝에 식은땀이 맺혔다. 문고리를 쥔 손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나를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2학기 첫 강의였다. '한국사의 이해'. 원래라면 1학년에 할당된 교양 강의라 2학년은 들을 일이 없었고, 다른 과 학생들이 섞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교대의 커리큘럼 자체가 워낙 폐쇄적이고 엄격한 부분이 있으니까. 그래서 이 수업 안에서는, 이 강의실 안에서는, 적어도 낯선 사람을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녀'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섬찟한 감각과 경고를 보내는 듯한 벽의 진동에 여전히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사실, 마주칠 리 없다고 믿고 싶었을 뿐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름과 얼굴, 학년, 학과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성격도 모르고, 나이도 모른다. 어떤 책을 좋아하는지, 친구들과 있을 땐 어떤 표정을 짓는지, 누굴 사랑했는지, 무엇을 미워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저 그녀를 주인공으로 수백 편의 이야기를 지어냈을 뿐이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 방향을.
"뭐 해?"
낯익은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정교가 손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안도 섞인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의지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고개를 살짝 저으며 문을 열었다. 정교는 어깨를 으쓱하며 뒤를 따라 들어왔다. 그래, 그녀가 있을 리 없다. 그녀처럼 웃을 수 있는 사람이 필수 강의를 수강하지 않고 넘어갈 리 없으니까.
"어? 저 사람 또 우리 과랑 같이 강의 듣네, 15라 하지 않았나?"
나의 믿음은 정교의 의문과 함께 무너졌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을 억지로 돌려 강의실을 천천히 훑는 내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교탁 앞, 창가 앞자리. 딱 그녀가 앉아있을 법한 자리. 아니, 내가 그녀를 그리던 자리. 책상 위에 팔을 괴고 앉아 창밖을 보는 그 모습은 내가 지난 학기 내내 상상해 왔던 장면 그 자체였다. 말도 안 되는 우연이었다. 다행히,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어쩌면 봤지만 모른척했을 수도 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라는 사람 자체를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녀는 내게 최초의 한 번을 제외하고는 먼저 말을 걸어온 적도 없었고, 나는 그저 복도 끝에서 그녀가 지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혼자 온갖 감정을 다 불태웠으니까. 지난 학기 체조실에서 그녀가 처음 말을 걸었을 때, 햇빛이 강하게 내려 꽂히는 오후였고 나는 지금까지 밤잠을 설쳤다. 겨우 그것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나와 같은 공간에 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치 그 모든 짝사랑의 상념들이 실제로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지만 기쁨보다 먼저 몰려온 감정은 공포였다. 식은땀이 어깨를 타고 흘렀고, 심장은 누가 움켜쥐기라도 한 듯 조여왔다. 마주친다면, 단 한 번이라도 다시 그녀와 같은 공간에 머물 수 있다면, 상상했던 그 수많은 장면들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내가 그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 혼자 만들어낸 허상을 붙들고 있었음을. 그 허상은 너무 아름다워서 나는 거기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현실 속의 그녀는 내 상상보다 훨씬 더 멀고, 단단하고,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그 거리감을 직면하자 나는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직면했다. 모순적이게도, 눈은 그녀를 계속 좇았지만 몸은 구석을 향해 움츠러들었다.
자리에 앉기까지 겨우 몇 걸음이었지만,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다. 시선은 애써 그녀를 피했고, 숨소리는 들킬까 봐 억지로 억눌렀다. 혹시나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순간 세상의 풍경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무너졌는지도 몰랐다. 그저 모르고 있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어째서, 어떻게...
나는 가방을 끌어안고 의자에 겨우 몸을 밀어 넣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넘어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깊고 검은 구덩이에 빠진 기분. 두렵고 혼란스럽고, 동시에 벗어나고 싶지 않은. 교수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감당하기에 너무 생생하고, 너무 두려웠다.
그녀는 옆자리에 앉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나와 눈을 마주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질적인 긴장감이 몸을 옥죄었다. 주변의 소음이 마치 유리벽 너머에서 울리는 것처럼 멀고 낯설게 들렸다. 한 칸을 건너뛴 고요 속에서 정교가 내 옆자리에 툭 하고 앉았다. 가방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야."
그가 나를 툭 건드렸다.
"앞줄에 앉은 애, 너도 알지? 그 여자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애써 듣지 않는 척했다. 지금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의 시작을 기다리고 싶었다. 숨을 죽이고 시선을 앞에 고정한 채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커다란 강의용 컴퓨터가 들은 교탁을 이리저리 살피며 시간을 끄는 교수가 원망스러웠다.
"저 선배도 이 수업 듣는 줄은 몰랐네."
정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맞다, 저 선배 우리랑 동갑이야."
나는 애써 반문하고 싶은 것을 참고 입을 꾹 다물었다. 내 환상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동갑'이라는 말 한마디에 머릿속에서 어떤 이미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저 그녀가 환하게 웃을 줄 아는 사람이고 조용히 학교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학번도 알고 학과도 알았지만 그것은 아주 단편적인 사실에 불과했다. 유추하지 않아도 당연히 알 수 있는 사실들. 그 편린 속에서 나는 내 마음대로 그녀를 그려냈다. 애초부터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전부 내가 만든 환상이었다.
"작년에 다른 학교 가려고 반수 했었대. 결국 실패하고 다시 학교 다니기로 했다나 봐."
정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해 떠들었다. 지난 학기의 만남도, 오늘의 만남도 이유 없는 만남이 아니었다. 단지 졸업 요건을 채우기 위해, 교양 강의 중 하나로 선택한 수업일뿐, 어떤 필연도 우연도 아니었다. 아니, '연'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스쳐감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괜히 말꼬리를 잡으며 중얼거렸다.
"...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았어?"
정교가 나를 힐끗 보고는 씩 웃었다. 속셈이 뻔하다는 웃음이었다.
"동아리 선배가 같은 과야. 물어봤더니 알려줬어."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강의실은 여전히 조용했고, 앞에서는 교수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 학기'한국사의 이해'는 시대 순서가 아니라 주제 중심으로 구성했습니다. 오늘은 오리엔테이션을 겸해서 전체적인 흐름을 설명드릴게요... 그 목소리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메아리쳤지만,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커리큘럼은 흐릿하게 흘러갔고 정교의 말은 또렷하게 맴돌았다.
정교의 말은 점차 덩치를 키워 나를 집어삼켰다. 왜 그녀에 대해 물어본 거지? 그 선배라는 사람은 어떻게 그녀에 대해 그 정도로 자세히 알고 있는 거지? 그녀에게 관심이 있는 건가? 그녀를 노리고 있는 건가? 그렇다면 왜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네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여자다,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이니 함부로 마음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 안에 내가 상상하던 서사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딘가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상상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질투. 그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감정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다고, 그럴 수 있다고, 그녀는 충분히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사람이라고, 나는 그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혐오스러운 질투는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