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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등급 인간(14)

by 전창훈

날카로운 햇빛이 눈을 찔렀다. 손을 들어 잔뜩 찌푸린 눈을 가리고 정교의 침대를 훑었다. 술을 그렇게 퍼마셨으면서 용케 일어나 수업에 갔는지 침대가 깨끗했다. 아무튼 여러모로 대단한 놈이라 생각하며 책상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방을 나섰다.

복도는 기이하리만치 고요했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11시였다. 오늘 첫 수업을 시작하는 강의가 많아 다들 수업에 가느라 기숙사는 텅 비어있었다. 나는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를 긁적이며 기숙사 뒤편으로 향했다. 이용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흡연장은 담배꽁초보다 먼지와 낙엽으로 뒤덮여 있었다. 먼지가 진득하게 내려앉은 벤치를 손으로 대충 쓸고 털썩 주저앉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아직 뻑뻑한 눈에 들이닥치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오늘 수업 아니야?"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교였다. 강의를 제외하고 그리 마주친 적이 없었건만 같은 방을 쓰게 된 후 이래저래 자주 마주치는 것 같았다. 인연과 운명에 대한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담배를 하나 건넸다. 정교는 작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담배를 건네받았다. 그는 기둥에 기대 담배를 피웠다. 벤치에는 앉지 않았다.


"내일부터야."


"무슨 강의 듣는데?"


"이름은 모르겠어. 교양인데, 한국사였던거 같아."


정교는 잠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며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아, 그거 듣는구나. 나도 그거 듣는데. 내일 9시부터 맞지?"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마지막 한 모금을 내뱉었다. 일어나자마자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바로 담배를 피워서인지, 입이 바싹 마르는 듯했다. 깊숙한 곳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와 눈썹이 찌푸러졌다.


"나 여자친구 생겼다."


정교는 그렇게 뜬금없이 연애 사실을 밝혔다. 그가 너무나 태연한 모습으로 그런 말을 했기에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말이 지닌 울림이나 의미에서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지내며 그의 사소한 습관이나 표정 변화, 말투를 어느 정도 알게 된 나에게는, 그리고 그가 작은 한숨만 내쉬어도 그의 불편한 심기를 읽어낼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신경을 가진 나에게는, 지금처럼 그의 태연하고도 뜬금없는 모습이 많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보였다.


"마음에 안 들어? 여자친구?"


그는 내 물음을 듣고 어떻게 알았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제 너 데려갔던 그 모임 기억나?"


그는 정말 하기 싫은 말을 하는 아이처럼 입을 우물거렸다.


"네가 갑자기 가고 나서 분위기가 조금 가라앉았어. 아, 너를 나무라는 건 아니야. 물론 사람들이 너를 두고 입방아를 찧어대긴 했지만 다들 술에 취해서 그런 거였고 다들 그 주제는 금방 잊었으니까. 아무튼 우리도 자리를 파하려고 일어났어. 더 마실 사람은 2차를 가고, 집에 갈 사람은 그냥 가려고 했지. 근데 옆에 앉아있던 애가 말을 걸더라고. 따로 더 마시자면서."


정교는 몸을 부르르 떨며 손깍지를 켠 채로 손을 바닥을 향해 꺾었다. 우두둑,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그의 팔뚝에 힘줄이 섰다.


"나는 그때 취해있어서 사리 분간이 어려운 상태였어. 그 여자애도 마찬가지였을 거야. 우리는 그 길로 2차를 갔어. 역 앞에 있는 치킨집, 너도 알지?"


사실 이곳에 살면서도 동네 음식점에 가본 적이 드물어 잘 모르지만 그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아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로 짧게 눈을 깜빡였다.


"2차이긴 하지만 워낙 이른 시간부터 마셔서인지 퇴근 후에 한잔하러 온 사람이 많더라고. 우리는 테라스에 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어. 둘만 있으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애가 자기 이야기를 막 하더라. 취해서 그런 것 같은데, 처음 본 사람에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했어. 자기 이름, 학번, 나이, 학과, 심지어 사는 곳이랑 부모님 직업까지 다 이야기하더라니까. 사실 별로 궁금하지 않았지만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막아봤자 분위기만 망칠 것 같아서 가만히 있었어."


그는 잠시 가방에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뚫어져라 보는 거야. 나도 그 여자애를 뚫어져라 쳐다봤어. 평소라면 왜 그러냐고 묻거나 눈을 피했겠지만, 나도 취한 거지.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다가 그 애가 먼저 내 손을 잡더라. 손이 참 작았어. 따뜻하고. 그리고 누가 먼 저랄 거 없이 입을 맞췄어. 진짜 오랫동안 맞대고 있었던 거 같아. 주변에서 우리를 보는 게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오래 그러고 있었으니까. 그 이후로 바로 사귀게 된 거야."


너무 대학생다운, 내가 경험하지 못할 청춘의 한 페이지 같은 이야기다. 사교적이고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좋아하는 대학생이 누가 깔아 둔 철로를 익숙한 궤도를 따라 달려가듯 당연스레 겪게 되는 그런 이야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조금 놀랐다. 물론 이야기 자체에 놀란 것은 아니다. 그는 충실한 대학생활을 즐기면서 내면의 열정과 고민을 놓지 않는 보기 드문 훌륭한 학생이었고, 흥청망청 자신을 놓아버리게 되는 술자리에서도 결코 타인의 이야기나 내면의 깊은 소리를 전달하지 않는 자제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심지어 경솔한 친구들이 어쩌다 알게 된 그의 비밀이나 타인의 소문에 대해 넌지시 아는 척을 하려 든다면 그 입을 부드럽게 막아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게 하는 사회생활 기술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놀란 지점은 그런 완벽한 정교도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는구나 하는 것이었고, 또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당연히 나를 싫어할 수 있었음에도 여전히 친절하고 절친한 태도로 자신의 속마음을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 됨됨이였다.


"그런데 뭐가 마음에 안 들어?"


정교는 정말 말하기 싫다는 듯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리고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아직 그 애 이름을 몰라."


"뭐?"


"아니, 이름은 대충 알지만 정확하지 않아. 사실 그건 핑계야. 이름이 뭐가 중요하겠어. 좋아하면 되는 거지. 근데 잘 모르는 사람이잖아. 잘 모르는 사람과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사랑한다고 말한 게 너무 부끄러워."


"그럼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네 행동이 싫은 거네."


정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지. 그런데 무엇보다도..."


"응?"


"얼굴이 내 취향이 아니야."


정교는 고개를 푹 숙여 무릎에 묻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오랜만에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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