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등급 인간(12)

by 전창훈

벽이 말을 걸어오는 듯 웅성거리는 소리가 귓가에 달라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팍을 짓누르는 불안감에 머리가 하얗게 비어 가는 느낌이었다. 속이 울렁거리고 손끝은 차갑게 식어갔다. 나는 중얼거렸다.


실격이야.

나는 이미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에 있었다. 빛조차 닿지 않는 그곳은 차갑고 어두웠다. 그 안에는 실패와 좌절, 자기혐오의 잔해들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마치 오래된 폐광처럼, 그곳은 더 이상 아무것도 품을 수 없는 황폐한 공간이었다.

때로는 거센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이라는 파도가 끊임없이 몰아쳤고, 나는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작은 나뭇조각처럼 그 파도에 휩쓸려 어디로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침반은 고장 난 지 오래였고, 등대는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였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날에는 소라게가 빠져나간 텅 빈 껍데기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처럼 공허하게,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미움도, 그 어떤 감정도 내 안에서 살아 숨 쉬지 않았다. 그저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공허만이 나를 채우고 있었다.

나는 결국 풀려버린 실이었다.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져 있었지만, 결국은 끊어지고 말 운명이었다. 희망의 끈을 놓아버린 나는 그저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일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바닥을 뚫고 지하로 향했다.

개강 파티는 역시나 지옥이었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투명 인간처럼 존재감이 없었다. 벽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밤거리는 여전히 시끄럽고 번잡했지만, 그곳보다는 견딜 만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저 멀리 그녀가 보였다. 예지. 여신, 천사, 나의 기준. 감히 다가갈 수 없는 존재.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여기서 뭐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천사의 속삭임 같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우물거릴 뿐이었다.

"저... 그냥... 좀..."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가로등을 붙잡고 속에든 것을 게워냈다. 술만 들이켜서인지 노랗고 투명한 액체만 뿜어져 나왔다.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 자신이 너무나 역겨워서인지 알 수 없었다. 토사물 위로 하얀 포말이 둥둥 떠올랐다.

"괜찮아요? 어디 아파요?"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를 지나쳐 뛰쳐나갔다. 더 이상 그녀 앞에 있을 수 없었다. 그녀의 따스한 시선, 걱정스러운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고통이었다. 나는 그저 이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벽이 다시 말을 걸어온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린다. 나는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웅크린 채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벽은 이제 나를 막아서지 않는다. 그저 비웃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버렸을까. 그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와 말을 걸어주었는데, 왜 나는 고작 구역질 몇 번에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도망쳐 버렸을까.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고, 걱정해 주었다. 나 같은 건 평생 느껴보지도 못할 다정함과 따스함이었다. 오롯이 나를 향한 유일한 따스함. 그런데 나는 그 모든 것을 걷어차 버렸다.

가로등 아래서 게워내던 추한 모습,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 그리고 도망치는 내 뒷모습. 그 장면들이 머릿속에서 연신 재생되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역겨웠을까? 실망했을까? 아니면 그저 안쓰럽게 생각했을까? 어떤 생각을 했든, 내 추한 모습이 그녀의 기억 속에 박혀버렸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멀쩡한 척이라도 했어야 했다. 최소한 그녀의 걱정에 괜찮다고 말이라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역겨운 구토감에,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그리고 그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비참함에 압도당해 도망쳐 버렸다. 나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중요한 순간에 항상 도망쳤다.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한 줄기 빛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데 나는 그 빛을 외면하고 어둠 속으로 도망쳐 버렸다. 벽을 향했다. 그런 나에게 그녀 곁에 있을 자격이 있는가. 그녀는 내게 너무나 과분한 존재다.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다시는 그녀를 봐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녀를 위한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가치조차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녀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길가에 토사물을 쏟아내는 추한 인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동정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저 역겨움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망치듯 방에 들어서자 벽이 멈춘다. 귓가를 맴돌던 웅성거림도 사라진다. 속이 울렁거리던 것도 거짓말처럼 진정되었다.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진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랑은 곧 절망이었다.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손을 뻗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너무나 눈부시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녀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먼지 같은 존재였다.

그녀를 다시 볼 수 있을까? 아니, 다시 봐서는 안 된다. 나는 그녀에게 상처만 주는 존재일 뿐이다. 그녀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이 그녀를 위한 유일한 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멈출 수가 없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게 끓어오르는 이 감정은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를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인간이다.

keyword
화, 목 연재
이전 11화9등급 인간(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