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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사과 Dec 19. 2022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언더독이 전하는 희망

나는 유령인간이었다.

특별히 어떤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눈에 띄지 않고 나서지 않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를 견지하며 살았다. 내 삶의 모토는 '가늘고 길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자'로 악쓰면서 쟁취하고 노력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피곤하고 지치는 일이었다. 심지어 영화를 봐도, 책을 읽어도 이를 악물고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는 시지프스형 인간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그들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대개 그러한 태도를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는 법이니까. 하지만 굴러 떨어지는 돌을 온몸으로 받히고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는 나에게 보기만 해도 거부감이 드는 부담스러운 유형이었다.


그런 나에게 도전하는 것의 아름다움과 언더독의 반란을 알려준 사람이 있다. 바로 AOS 장르의 세계적 인기 게임 League of Legends(이하 LOL) 프로게이머 Pray(김종인)이다. 1세대 LOL 프로게이머 중 한 명인 Pray는 나진 소드, 락스 타이거즈, 킹존 드래곤 X, kt 롤스터 등 여러 팀을 옮겨 다니며 자신의 실력과 존재감을 입증하였다. 엄청난 컨트롤 실력, 넓은 시야, 정확한 오더(명령), 뛰어난 직감 등 선수로서 능력도 굉장히 출중하지만 내가 그에게 감명을 받은 것은 그가 선수 시절 밟아온 삶의 궤적과 태도였다. 이제는 은퇴하고 제2의 삶을 살고 있지만 과거 그는 언더독을 자처하며 프로 리그에 돌풍을 몰고 왔었다. 당시 Faker(이상혁) 선수가 이끌며 무적함대라 불리던 SKT T1의 원딜러 뱅 또한 그에게 벽을 느꼈다고 말할 정도로 Pray를 필두로 한 그의 팀이 몰고 온 언더독의 반란은 많은 팬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한마디로 낭만이 있었다.

최고의 선수 중 하나인 프레이(김종인)-출처 게임플

그에게 반해 LOL을 시작했고 조금은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살아왔지만 나태하고 방만하게 살아왔던 과거는 쉽게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던 2022년의 어느 날 나의 의지에 다시금 불을 붙이는 일이 일어났다. 바로 Deft(김혁규) 선수가 이끄는 DRX의 미라클 런을 알게 된 순간부터였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2022년 연말 대한민국을 크게 강타한 이 유행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카타르 월드컵 16강전에 오르며 태극기에 써넣은 문구로도 유명한데, 이는 월드 챔피언쉽 그룹 스테이지 1라운드 RGE와의 대전에서 패배한 이후 Deft 선수가 인터뷰에서 말한 것이다. 그만큼 DRX의 미라클 런은 아름다웠고 처절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1. 그게 뭔데?


DRX의 미라클 런을 말하기 전에 LOL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간단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이에 우선 기본적인 설명과 함께 대회의 중요성과 세계적인 위상을 설명하려 한다.


League of Legends 란?


리그 오브 레전드. 약칭 LOL(롤)은 라이엇 게임즈가 개발한 5대 5 팀 대전 AOS 장르로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저를 보유한 게임이며 한국에서는 2011년부터 서비스를 시작했으고 북미 기준 13년째 서비스를 이어가고 있는 장수 게임이다.  롤의 시스템은 간단하다. 상대팀의 조합과 전적을 바탕으로 아군의 조합을 구성하고 다양한 전략과 플레이 스타일로 상대 본진을 격파하는 것이 승리 조건이다. 단순하지만 오래된 만큼 챔피언과 전략이 셀 수 없이 많고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승리를 쟁취하려 하기에 쉽지는 않다.  


LOL에는 라인 시스템이 있다. 초창기에 전략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는 유저들이 자유롭게 조합을 구성했지만 대회에서 유럽 팀이 'EU 스타일'을 선보인 이후 정석처럼 굳어져 다들 이를 따르고 있다. 기본적인 구성은 상단 공격로 1명, 정글 1명, 중단 공격로 1명, 하단 공격로 2명(원거리 딜러, 서포터)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이 잘 다룰 수 있는 챔피언을 고르거나 상대방의 조합을 보고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소환사의 협곡의 조감도. 레드 팀 기준으로 그린 상단, 중단, 하단 공격로와 정글이다.

LOL에는 자신의 위치를 알 수 있는 티어 시스템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는데, 아이언, 브론즈, 실버, 골드, 플레티넘, 다이아몬드, 마스터, 그랜드 마스터, 챌린저까지  9개의 랭크 구간이 있으며 승리를 할 때마다 일정 점수를 획득하여 랭크를 올리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보통 1년에 1개의 시즌이 새로 시작하는데, 랭크는 시즌마다 초기화되며 새로운 시즌이 시작하면 배치를 통해 다시 랭크를 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전 시즌의 랭크가 현 시즌 배치에 반영되기에 시즌 막바지에 어떻게든 높은 랭크에 오르려고 발악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랭크 시스템. - 출처 리그 오브 레전드 고객 지원 센터


이것이 LOL의 기본적인 설명이다. 오래된 게임인 만큼 설명을 하려면 끝이 없기에 기본적인 용어만 설명했다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대회의 중요성 및 세계적 위상


게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e스포츠 대회는 세계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받으며 인기를 끌고 있다. LOL의 등장은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지 못했던 e스포츠계에 가히 지각변동이라 할 만한 변화를 몰고 왔다. 한국에서는 과거 블리자드 사의 스타크래프트와 워크래프트의 인기로 e스포츠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승부 조작과 더불어 정부 부처의 게임 업계 탄압 등이 맞물려 그 입지를 잃어가고 있었다. LOL은 이러한 게임 업계에 혜성처럼 등장해 2013년에 열린 2012 한국  e스포츠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그 인기를 증명했다. 현재는 야구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내 스포츠 종목보다 압도적인 인지도와 규모를 자랑하며 세계적으로도 자국 리그 체제까지 갖춰진 대형 리그로 성장하였다.


미국에서는 타 메이저 스포츠 선수와 마찬가지로 e스포츠 선수에게 비자를 발급하기 때문에 세계대회 참가의 자율성이 높아졌다. 이는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e스포츠를 하나의 스포츠 문화로 승인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22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약칭 롤드컵) 결승전 시청자 수는 514만 7699명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2021 롤드컵 시청자 수는 401만 8728명으로 전년도에 비해 약 113만 명이 증가하였다. 이는 중국 지역 수치는 제외한 결과이다. 역사가 짧은 스포츠 이벤트가 이 정도로 성행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자카르타 팔렘방에서 열린 2018 아시안 게임에서 시범종목으로 채택되기도 한 만큼 전 세계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2019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 오프닝 공연. - 출처 다음 데일리 e 스포츠

대한민국의 자국 리그 LCK는 4대 메이저 리그에 속하며 타국에서 선수 및 감독, 코치를 천문학적인 몸값을 주고 모셔가려 경쟁을 할 만큼 쟁쟁한 라인업이 포진해있다. 수준 높기로 악명 높은 한국 서버에서 이른바 '폐관 수련'을 하러 오거나, 한국 팀과 전지훈련을 하고 싶어 하는 해외 팀이 줄을 설 정도로 경쟁력이 높은 LCK는 Faker를 대표로 하여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대거 탄생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2. 드라마의 시작

DRX는 2022 시즌 내내 일정하지 못한 경기력으로 비판을 받았다. 스프링 리그 5위, 서머 리그 6위의 저조한 성적으로 마무리했지만 롤드컵 선발전에서 악착같은 명승부로 4 시드에 배정받아 롤드컵에 진출한다. 그들의 돌풍을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반등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그룹 스테이지 이전, 예선전 플레이 인 스테이지를 전승으로 마감한 DRX는 기세 등등하게 나섰지만 RGE와 대전에서 아쉽게 패배하고 만다. 이때 인터뷰에서 Deft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

이라는 문구를 남기며 8강 조별 리그 1위로 진출한다.

이후 디펜딩 챔피언 EDG(Edward Gaming)를 꺾고 Gen.G를 잡아내며 결승에 오른 DRX는 무적함대 T1의 Faker를 꺾고 우승을 차지한다. 여담으로 Faker선수는 '불사대마왕(The Unkillable Demon King)'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엄청난 직감과 피지컬로 생존하며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데 일가견이 있다.

e 스포츠의 전설 그 자체인 페이커(이상혁) - 더 게임스 데일리

가장 불리한 조건,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아득바득 정상에 오른 DRX의 행보는 많은 팬들의 마음을 울렸다. 이와 동시에 Deft의 발언은 언더독 신화를 입증하는 낭만적인 대사가 되어 사회 각 분야에 활용되기 시작했다. 또한 2022 롤드컵 주제가 Lil Nas X의 STAR WALKIN'의 가사 중 "Don't ever say it's over if I'm breathing."이 마치 DRX 미라클런을 상징하는 것 같아 그들의 서사에 완결성을 부여했다.


SKT T1의 간판 페이커 선수는 농구의 마이클 조던과 같은 위상에 있는 인물로 수도 없는 대회 우승 경력과 기록을 만들어내 우리 세대 최고의 선수로 불리고 있었다. 또한 기라성 같은 신인들과 여러 전설들이 가득한 2022 롤드컵을 완벽히 제압하고 정상에 오른 DRX의 반란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주었다. 그들의 행보를 축구에 비유하면 월드컵에서 상대적 약체에 속하는 대한민국이 강팀을 하나씩 잡아내며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해낸 것이다. 꺾이지 않는 마음 하나로.



3. 눈물의 중. 꺾. 마


Deft 선수가 우승 소감 인터뷰에서 흘린 눈물의 의미는 단순히 우승에 대한 기쁨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e스포츠계에서 선수들의 생명은 생각보다 짧다. 데뷔 초에 역사를 쓰고자 전설에 도전했던 선수들도 현실과 타협하며 떠나가고, 타고난 피지컬과 감각이 중요한 영역이기에 쉽게 소진되기 때문이다. Deft 선수는 이 외롭고 고된 싸움을 10년간 계속해 왔다. 누군가는 그를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 칭하지만 세계 대회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지 못했기에 스스로 부담감과 자괴감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갈고닦아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고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이들의 서사는 LOL을 즐기는 유저를 넘어 메인스트림에 등장하였고 결국 카타르 월드컵 16강 진출 세리머니의 한 부분을 장식하였다. 뉴스나 커뮤니티, SNS를 보면 체념에 가깝거나 포기를 종용하는 듯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넘친다. 이는 현재가 살아가기 험한 세상이라는 것을 반증하는 듯하다. 그러나 이 명언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우리 시대가 잃어버린 노력, 의지, 희망 같은 가치들이 그 빛을 발하는 순간이라 보이기도 한다.


폴란드의 판타지 소설이자 게임, 넷플릭스로 미디어 믹스가 이루어진 <위쳐>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은 그 사회의 성숙도를 반영한다. 오바마 대통령의 폴란드 방문 당시 폴란드 국무총리는 게임 [위쳐 2 : 어쌔신 오브 킹]을 선물했다. 보통 귀빈에게 국가를 대표하는 특산품을 제공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럼에도 게임을 선물한 것이다. 이에 대한 오바마의 반응이 더욱 걸작이다. 그는 게임은 새로운 세계 경제에서 폴란드의 위치를 보여주는 대단한 예라 들었고, 이것이 폴란드 국민들의 재능과 근면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리더들의 현명한 관리 능력을 보여주기도 한다고 답했다.

게임 [위쳐] 시리즈 중 가장 흥한 3편 와일드 헌트. - 사진 출처 나무위키

게임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알겠지만 게임 업계에서 한국이 가지는 위상은 대단하다. 특히 열성적인 유저들을 위해 유명 게임사에서 한국 유저들을 위해 이벤트를 열어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또한 [배틀 그라운드], [검은 사막], [로스트 아크] 등 국산 발 게임이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개발진의 역량이 대단하다 보인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다시금 의지를 불태울 수 있도록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Deft와 DRX(현재는 공중분해되어 아쉬움이 남는다.)처럼 세상 모든 이야기에는 가치가 있으며 분야가 얼마나 키치 하든 숭고하든 관계없이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 자치를 발견할 수 있음이 중요하다. 부디 게임은 애들이나 하는 것이며 교육상 옳지 못하다는 선입견을 내려놓고 스포츠계의 언더독 e스포츠를 응원해달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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