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곧, 틈

어느 날 마주한

by 류서안

감정이 없어서 글을 쓰기 힘들다 했다.

내가 말하는 감정은 사실 슬픔, 좌절, 짜증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늘 가라앉는 마음부터 감정이라고 불렀던가.


저녁의 집은 조용했다. 조용하지만 어쩐지 비어 있진 않았다. 냉장고가 돌아가는 소리, 멀리서 물이 한 방울 떨어지는 소리, 고양이가 간식을 조르는 소리. 새삼스럽게 신경 쓰이는 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혼자 있는 집에서 헤드폰을 쓰고 노래를 골랐다. 우연히 찾은 노래는 나에게 꼭 필요했던 소리처럼 울렸다. 헤드폰의 음악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붕 떠있던 내가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다. 신경 쓰이기만 했던 소리들은, 내가 고른 소리로 덮어져 기분마저 덮어버렸다. 피곤하고 가라앉았던 내가 어느새 노래를 흥얼거렸다.

좋아지는 기분에 갑자기 바로 지금 이것을 글로 쓰고 싶어 졌다. 지금 단어들을 잡아내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종종 그런 확신은 감정보다 먼저 온다. 감정의 정체를 알아채기 전, 손이 먼저 알아차린다.


기분이 좋아짐으로 글이 써지는 것이 생경했다. 항상 고민하고 가라앉힌 마음으로 써 내려가고 싶었던 것은 나의 어쩌면 강박적인 태도였을까. 좋은 기분에도 들뜨지 않은 글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깨달았다. 나는 내 안의 감정에 과몰입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깨우쳐버리는 찰나, 문득 너가 떠올랐다.

무엇이든 진지해야만 진짜 같다고 믿던 나. 가라앉는 마음에 기대서야 겨우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생각하던 너.

너는 아마 이런 얼굴로 나를 봤겠지. “그거 알아?”라고, 말하지 않고 말하는 얼굴로.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네가 감정을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저 아래, 진득하게 가라앉아야만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진지함은 깊이의 증명이고, 어두움은 솔직함의 표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래서 문장도 늘 아래로만 내려가려고 했다. 마치 바닥에 닿아야만 글이 된다는 것처럼.

근데 글을 움직이는 건 내가 나의 감정을 알아차리는 순간일까.

“아, 내가 지금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이름 붙일 수 있는 그때,

“내가 지금 행복하구나.” 혹은 “내가 지금 조금 가라앉아 있구나.”

그 알아차림으로 문장을 쓸 수 있다면, 그때부터는 어떤 감정이든, 그것을 통과하는 나를 기록할 수 있게된다. 나는 그날 저녁,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확인했다.

손이 움직이고 싶어 졌다는 것. 떠오르는 문장들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것. 그 다급함이 나를 다시 책상 쪽으로 당겼다. 슬픔이 아니어도, 좌절이 아니어도, 일단 시작할 수 있었다.

시작은 곧 틈을 만든다.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작은 틈을 만들고 싶다. 너를 생각한다. 너는 내 글 위에서 어떤 감정으로 나를 마주 볼까. 틈사이에서 어떤 마음이 비집고 나올까. 오늘은 우연히 만나게 된 기쁨이었지만, 내일 저녁의 나는 어떤 기분으로 너를 마주할까.

있는 그대로의 하루 위에, 아주 조금의 상상을 얹어서. 나의 감정을 깨달으면서.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