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어머님,
오늘 구순의 자리에 앉아 계신 어머님의 얼굴을 뵈니, 마음이 참으로 벅찹니다.
긴 세월을 돌아보면 그 길이 몹시 험난했음에도, 어머님은 언제나 좌절보다는 전진을 택하셨지요.
감사와 기도로 하루하루를 버티시며, 마침내 믿음 안에서 오늘에 이르셨습니다.
전귀니 어머님,
처음 어머님의 함자가 ‘서운’이라는 말을 듣고 의아했었습니다.
예전에는 ‘애기’, ‘막례’, ‘돌이’, ‘근심이’ 같은 이름이 흔했지만, 막상 어머님의 이름이 ‘서운’이라 하시니 가슴이 서늘해졌습니다.
위로 아들 둘을 잃고 태어나서 외할아버지가 그렇게 호적에 올리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서러웠던 시절의 어머님을 꼭 안아드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귀니’라고 불렸다는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지요.
‘귀해서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그 이름이야말로 어머님의 삶을 가장 아름답게 닮은 이름입니다.
이제부터는 존경과 사랑의 뜻을 담아, 어머님을 ‘귀니 어머님’이라 부르겠습니다.
인내의 상징, 귀니 어머님,
어머님의 신혼은 애처로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갓 결혼해 새댁 티도 벗기 전에 아버님은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에 입대하셨지요.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절, 아버님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시며 나라를 지키셨고, 어머님은 시댁 어른을 모시며 삼대독자 집안을 홀로 지켜야 했습니다.
기다림은 길고 막막했을 것입니다.
새벽마다 신께 매달리며 눈물로 기도하셨을 그 정성이
결국 아버님을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한 힘이 되었겠지요.
그 후로도 어머님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육 남매를 낳으셨지만, 단 한 번도 아기를 등에 업어보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젖만 먹이고 곧바로 논밭으로 가야 했어. 등에 아기를 업은 아낙네를 보면 어찌나 부럽던지.”
그 고백이 지금도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논과 밭에서 흙을 일구고, 손바닥이 갈라지고 허리가 굽어도
어머님은 한 번도 일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엄하고 가부장적인 시부모님 밑에서 어머님의 자유는 허락되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나 모진 비바람 속에서도 어머님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하루 먹을 양식이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 믿음과 감사의 기도가 어머님의 하루를 지탱했고,
결국 육 남매는 굶주리지 않고 건강하게 자라났습니다.
사랑의 귀니 어머님!
제가 시집와서 가장 먼저 배운 음식이 콩나물 볶음이었습니다.
달궈진 솥에 기름을 두르고 “지지직” 소리가 날 때 콩나물을 넣으라던 말씀.
그 순간, 부엌 가득 퍼지던 고소한 향 속에 어머님의 인생이 제게 스며들었습니다.
소박하지만 정직한 음식, 그 안에는 삶을 단단히 붙드는 지혜가 담겨 있었습니다.
김장김치 또한 화려한 양념 대신, 시간이 익혀주는 담백한 정직함이 스며 있었지요.
익을수록 깊어지는 그 맛은, 어머님의 인생과 닮아 있었습니다.
육 남매를 키우는 길은 언제나 험했습니다.
병든 아이의 이마를 짚으며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들,
논밭에서 돌아와 숨 돌릴 틈 없이 밥상을 차리시던 일상.
그럼에도 어머님은 단 한 번도 “너 때문에 힘들다”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언제나 웃음으로 자식들을 맞으셨습니다.
제가 삐뚤빼뚤 꿰맨 이불 호청조차 “처음 치고는 잘했다.” 그 한마디 칭찬이 어린 제 마음을 포근히 덮어주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님은 사랑과 기도, 칭찬으로 가정을 세우셨습니다.
인생의 여러 고비마다 불안에 흔들릴 때마다,
저는 어머님께 기도를 부탁드리곤 했습니다.
새벽마다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시며 자식과 손주들을 위해 올리셨던
그 기도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 기도의 힘으로 저희가 오늘까지 살아올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받은 것은 셀 수 없이 많건만, 드린 것은 너무도 적습니다.
걱정 끼치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오히려 근심을 더 드린 적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님은 원망보다는 언제나 웃음으로 덮고, 사랑으로 품으셨습니다.
그 크신 사랑 앞에서 저는 오늘도 고개 숙입니다.
귀하고 소중하신 어머님,
이제는 근심을 모두 내려놓으시고, 활짝 웃으실 수 있도록 저희가 더욱 힘쓰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남은 날들이 햇살처럼 다사롭고, 들꽃처럼 고요하길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육 남매와 손주들, 그리고 며느리와 사위 된 저희 모두는
어머님께서 평생 보여주신 그 사랑과 기도의 마음을 잊지 않고,
믿음 안에서 정직하고 따뜻하게 살아가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어머님,
구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 저희는 한마음으로 고백합니다.
“어머님, 참 고맙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주님의 평안이 언제나 어머님 곁에 머물기를 진심으로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