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과의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의 증언
지금 거의 모든 인간은
살과의 전쟁 상태에 있다.
이 전쟁에는 휴전도, 종전도 없다.
참가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조상으로부터
‘훌륭한 DNA’라는 전쟁 불참권을
물려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한다.
의지가 부족하다고.
식습관이 문제라고.
운동을 안 해서 그렇다고.
알고 있다.
뭐가 문제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커진 몸이 만들어내는 피해의식,
점점 줄어드는 자존감,
이 전쟁에서
과연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불투명한 공포를.
고등학생 때였던 것 같다.
교복 바지가 찢어졌다.
체육복 바지를 입고
위에는 교복을 걸친 채
버스에 탔다.
분명 옷은 입고 있었는데,
그날의 나는
벌거벗은 것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버스 안 여학생들의
작은 웃음이
아마 트리거였을 것이다.
그 순간 생각했다.
이 부끄러움,
다시는 겪고 싶지 않다고.
그건 다짐이라기보다
결의에 가까웠다.
전쟁을 끝내야겠다는
계백의 마지막 각오 같은 것.
그때 나는 깨달았다.
이 전쟁에서 가장 무서운 건 살이 아니라,
‘아직 괜찮다’고 말해주는 나 자신이라는 걸.
고3 마지막 해,
나는 하루에 세 번 헬스장에 갔다.
스스로에게
“나는 초식동물이다”라는
암시를 걸었다.
전쟁은 일단 끝났다.
지금까지도
큰 요요 없이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가끔 그 버스 안이 떠오른다.
그때의 수치심이
나를 무너뜨린 게 아니라
나를 밀어 올렸던
트리거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종종
표면적인 감정에만 반응하다
그 너머의 신호를 놓친다.
그 신호는
예고 없이,
아주 불쾌한 모습으로 찾아온다.
만약 온다면,
외면하지 말길 바란다.
그건 당신을 망치러 온 게 아니라,
당신을 다음 단계로 밀어 올리러 온
몇 번 오지 않는 신호일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