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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은 Oct 13. 2024

그 섬의 타임캡슐

유실된 마음의 행방을 찾아서

깊고 깊은 바닷속에 묻혀 있었다던 와인을 남자는 여자에게 건넸다. 50년 전 항해 중이던 와인상들이 빠뜨린 와인을 경매에서 샀다고 했다. 와인을 음미하는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와인보다 깊었고, 여자는 50년 된 와인인지, 그 와인을 구한 남자인지 모를 감격에 젖어 있었다. 프랑스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바닷속에 잠들어 있던 와인은 50년 후 한 남자의 사랑의 메신저가 될 거란 걸 몰랐겠지. 지금도 어딘가 깊고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자신의 운명을 알 수 없는 난파되고 유실되고 혹은 의도된 물건들의 행방이 궁금해질 즘, 나 역시 그런 물건이 하나 번득 떠올랐다. 나는 깊고 깊은 서랍 속 먼지를 쓰고 잠들어 있던 한 장의 사진을 꺼냈다. 15년 전 한 그루의 나무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왜 그동안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잊고 있었다는 거짓말을 할 셈이냐고 나무는 나에게 지난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말들을 잠재우기 위해 나는 지금 ITX-청춘 열차를 타고 춘천으로 가고 있다. 이 열차의 이름은 왜 청춘 열차일까, 춘천에는 유독 많은 청춘들의 추억이 서려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나 역시 15년 전에는 하나의 청춘이었음을. 그 청춘의 말간 얼굴을 마주하러 간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겸연쩍어지기도 했다. 나는 열차의 주위를 둘러본다. 수많은 청춘 남녀들이 삼삼오오 시시덕거리며 앉아 있다. 그 환하고 밝은 청춘들을 보며 내게도 저렇게 눈부신 한 때가 있었지. 서로의 얼굴만 봐도 맥락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오고 쇠똥 굴러가는 것만 봐도 배시시 웃게 되는 너무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좋다 하던 한 때가 있었지 아마, 생각한다. 하지만 그날, 15년 전 그날 말이다. 만석이어서 그랬는지 젊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차칸에 기대어 그와 마주 보고 있었을 때, 우리의 만남은 불순하기도 불손하기도 하다고 느꼈던 것 같다. 또 뭐라고 거짓말을 하고 나왔느냐는 힐난 같은 비난조의 나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대답하는 그의 대답이 역시나 또 거짓인 것을 나는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으리라.


나중에 언젠가 생각이 날 때 와서 꺼내 봐.


그는 재킷의 품에서 주섬주섬 알 모양의 무언가를 꺼냈다.


뭐예요? 나는 물었다.


타임캡슐.


뭔 타임캡슐?


지금 이 순간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담았어.


알 속에는 메시지를 담은 종이가 고이 접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알을 품은 메시지, 타임캡슐을 묻을 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토요일, 남이섬은 데이트하는 남녀들과 가족단위 여행객들로 역시나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우리는 암암리에 혹여 아는 사람을 만나 우리 투샷을 들킬까 조심하며 걸었다. 그랬다, 우리는. 회사 근처에서 되도록 멀리 떨어져 만났고, 떳떳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렇듯 늘 눈에 띄지 않는 장소를 찾아다녔다. 종종 가끔 나는 그게 불만이었고, 그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미안하다는 말에는 불만을 토로할 뻔도 하였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적당한 한적한 장소 앞에 멈춰 선 그 앞에 한 그루의 나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가져온 삽을 들어 나무 아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임캡슐을 묻었다. 그 손놀림이 무척이나 진지하고 정성스러워 보였다. 그 순간 나는 그가 그토록 정성스럽게 묻고 있는 것이 나를 향한 마음이라기보다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못한 우리의 관계가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15년 후 오늘, 나는 사진 속 나무의 자리를 찾아 헤맨다. 우여곡절 끝에 비슷한 나무를 찾았고 그 나무 아래를 파 보았지만 없었다, 나를 향한 그의 마음은. 그 나무가 아닐 수도 있고, 이미 어떤 식으로 파헤쳐져서 어느 틈엔가 나동그라져 이리저리 굴러 그 존재가 망가져 버린 걸 수도 있고, 그러다가 누군가의 무심한 발길질에 섬 끝까지 굴러갔다가 물속에 빠져 심연 속으로 영영 가라앉아 버렸을 수도 있다.


그 섬의 타임캡슐은, 그렇지만 15년 전 춘천행 기차를 마지막 이별여행처럼 탔던 그와 나의 시간 속에 묻혀 다만 존재하고 있으리라. 끝내 열어보지 못하고 봉인된 깊고 깊은 그 섬 깊은 곳에.


나는 섬의 끝에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본다. 해가 뉘엿뉘엿 온화한 빛을 발하며 물살 위에서 반짝이고 있다. 나는 강물 위로 사진을 띄워 보낸다. 그와 나의 그때 그 순간이 흘러간다. 나는 그렇게 해지는 풍경을 따라 내게서 멀어져 가는 시간의 강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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