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영은 Nov 17. 2024

고요한 남자

마음의 심연은 고요함 속에 있지 않을까

그는 말수가 적은 남자였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나와 그 말을 귀 기울여 들어주는 그로 우리의 만남을 압축할 수 있었다. 눈을 맞추고 집중해서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습에 반한 것 같다고 훗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연애의 종착점에서 아이러니한 결과를 안겨주었다는 사실에 나는 씁쓸해하곤 한다.


그날의 호수는 매우 고요했다. 말수 없는 그를 닮은 것 같았다. 날이 갈수록 그의 말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을 즈음, 나는 이 여행을 제안했다. 연애 초반에 왔던 장소에 다시 오면 그의 말들이 돌아오지 않을까 작은 기대를 하면서.


우리는 저녁으로 닭갈비를 먹고 반주로 맥주 세 병을 나눠 마셨다. 얼굴이 빨개진 그와 하얘진 나는 밤의 호숫가를 거닐었다. 하나 둘 밝혀진 가로등 불빛들이 어두운 물결 위에서 흔들림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 예쁘지 않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멈춰 세웠다. 가로등 불빛 아래서 나누는 키스를 기대하며 그의 붉은 얼굴을 손으로 만졌다.


“뜨겁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벤치에 앉았다.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을 그 옆에 앉혔다. 


“요즘, 무슨 일 있어?”


내가 물었다. 


“아니.”


“왜 맨날 아니라고 해? 무슨 일 있잖아. 먼저 좀 말해 주면 안 돼?”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없어, 무슨 일”


“근데 왜 말을 안 해?”


“할 말이 없으니까.”


나는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할 말이 없어? 그게 지금 나한테 할 말이야?”


격앙된 나의 목소리를 스스로 느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왜 그래?”


“그 말 그대로 반사야. 오빠야 말로 도대체 왜 그래. 왜 아무 말도 안 하는 건데.

 회사일이건, 가족일이건, 친구 일이건 나는 시시콜콜 먼지 한 톨까지

 오빠한테 다 말하는데, 오빠 너는 왜 아무 얘기도 안 해? 나 말고 다른 사람들하고 

 어떻게 지내는지, 오늘 점심은 뭘 먹었는지, 회사 부장이 요즘은 안 부려먹는지, 

 승진 시험은 어떻게 돼 가는지, 어머니 건강은 어떠신지... 난 오빠에 대해 

 하나부터  열까지 다 궁금한데 아무것도 말 안 해 주잖아.”


나는 참았던 울분이 쏟아져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그게 그렇게 중요해?”


그는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내 눈물을 닦아주지도 않고 물었다.


“중요하지. 연인 사이엔 정말 중요하지. 모든 걸 공유하는 게 연인 아냐?

 내가 요즘 어떤 기분이 드는 줄 알아? 마치 로봇에게 대화하는 것 같아.

 아니지, 요즘 로봇도 오빠보다는 성심껏 대답해 주지. 나는 그냥 벽 보고 얘기하는 

 기분이라고!”


 “미수야!”


 그가 나의 이름을 이렇게 낮은 톤으로 부를 때 그것은 좋은 조짐이 아니었다. 


“나는 살인미수도 살인하고 똑같다고 생각해.”


최근 들어 가장 길게 말하고 있었음에도 그는 이 맥락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하고 있었다. 


“뭐?”


“나는 네가 말한 회사, 가족, 친구, 부장 얘기보다 

 연인 사이에 가장 중요한 공유는 속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해”


“지금 내가 뭘 속였다는 거야?”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달려 들 기세로 소리쳤다.

그는 여전히 동요 없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네 마음! 너 더 이상 나 사랑하지 않아. 

그래서 그렇게 공허한 말들을 헛헛하게 내뱉는 거잖아. 

그것도 모자라 나의 침묵마저 못 견뎌하잖아.”


“뭐라는 거야, 지금?”


나의 목소리는 억울함의 가면을 쓰고 당황함의 진실 속으로 숨어들고 있었다.


“너는 지금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어. 그 사람을 나도 알고. 

어떻게 알았는지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은 생략할게.”


나는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호수 위에 비친 가로등도 미동이 없었다. 


“기다렸어, 나는.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림은 시끄럽지 않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한밤의 호수 위로 고요하게 퍼졌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말이 그 위에 물결처럼 쌓였다.


“네가 그 사랑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나는 받아주지 않을 거야.

그러니 그 사랑에게 잘 가.”




일요일 연재
이전 04화 악 쓰는 여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