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과 숙면의 아이러니와 진실을 찾다
골목 끝에서 악 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날카롭게 깨진 유리조각에 손이 베이듯 한밤의 고요를 깨뜨리는 소리였다. 나는 막 24시 편의점을 나와 골목 끝으로 가고 있던 참이었다. 여자의 소리에 나는 가던 걸음을 주춤했다. 너무 놀라 하마터면 손에 든 비닐봉지를 떨어뜨릴 뻔했다. 오늘도 불면에 시달리는 나의 곁을 지켜 줄 반려주와 반려깡이 든 소중한 봉투였다.
악-
또 한 번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첫 번째 소리보다 더욱 강력한 울림이었다. 한밤의 골목 따위가 아니라 우주 끝까지 목청을 목숨처럼 내 던질 기세의 소리였다. 이미 금이 간 한밤의 고요에 지진이 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의 진동으로 악-악-악- 여자는 세 번 더 소리를 질렀다. 곧이어 그 소리는 의미를 실어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그 의미가 여자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최대치라고 대듯이.
“나는 이렇게는 절대 못 헤어져!”
매우 명료하고 또렷하게 외치는 여자의 소리가 너무 청명해서 잠에 빠져들어야 하는 내 정신까지 너무 쨍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봉투에서 소주병을 꺼내 결연하게 뚜껑을 따고 나발을 불었다. 한 모금, 두 모금 목구멍으로 차가운 소주가 콸,콸,콸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소주병을 손에 든 채 내 갈 길을 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을 골목 끝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빨리 저 여자 앞을 지나가자.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엮이면 매우 골치 아플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떨쳐버리기 위해 나는 빠르게 걸었다. 골목 끝에 다다를 즈음, 주저앉은 여자의 실루엣이 가로등 불빛 아래 출렁이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여자의 길고 긴 머리가 바닥에 닿아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가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버려?”
긴 머리카락을 들어 올리며 갑자기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내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여자는 입을 달싹 거렸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날 이렇게 처참하게 버려?”
여자는 내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미친 듯이 외쳐댔다. 그녀를 피해 빠르게 빠져나오려는 나의 발을 그녀의 손이 왈칵 움켜잡았다. 그 순간 딸꾹질이 나왔다. 딸꾹-딸꾹- 하면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여자는 주섬주섬 일어섰다. 너무 울어서 마스카라가 얼굴을 뒤덮고 긴 머리카락이 얼굴에 들러붙은 여자는 패잔병 같았지만, 모든 전력을 다 쏟아내어 아쉬울 것 없는 전투를 치른 병사 같았다. 그러나 여자의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여자는 내 손에 든 소주병을 움켜쥐었다. 나도 뺏기지 않으려고 더욱 꽉 그러잡았다.
“내놔!”
여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소주병을 빼앗고 있었다. 탁- 나는 잡고 있던 소주병을 놓아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여자를 흔들어 보았다.
“저기요, 괜찮아요?”
119를 불어야 하나... 나는 추리닝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만졌다. 그때 여자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얼굴을 뒤덮은 머리카락을 살짝 들춰보았다. 말라비틀어진 눈물과 머리카락이 뒤섞인 여자의 얼굴은 어느새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나는 여자의 가방을 여자의 머리에 대 주었다. 그때 갑자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추리닝 윗옷을 벗어 여자의 몸을 덮어 주었다. 나는 여자가 움켜쥔 소주병을 살며시 빼서 마셨다. 목구멍을 타고 소주가 내려갈수록 잠이 깨고 있었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도 있었다. 여자는 쌔근쌔근 잘도 자고 있었다. 모든 것을 쏟아낸 여한이 없는 잠 같았다. 나는 그녀의 잠이 정말 부러웠다. 어쩌면 나의 불면은 악을 쓰지 못해서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사랑했고,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 이것이 불면과 숙면의 아이러니이자 진실이 아닐까. 이 눈이 그치고 아침이 오면 나도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악을 쓰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 번이라고 달게 잠을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