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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영은 Nov 24. 2024

너의 쓸모

버려지지 않는 것들은 중요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오늘 제주의 기온은 12도, 흐린 날씨라던 기장의 말대로다. 나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알맞은 날의 흐린 하늘 밑 바다를 마주하고 있다. 2년 만에 찾은 11월 제주 바다는 매우 잔잔하다. 서울에서부터 요동치던 내 마음도 잠시 저 바다처럼 잠잠해지나 보다. 고요한 수평선 끝에 시선을 멈추고 나는 난데없이 너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너의 첫 번째 쓸모는 27년 모태솔로였던 나를 구제해 준 것이었다. 너를 만나 따분했던 주말에 늘 데이트 약속이 잡혔고, 네가 기다리는 출근길 환승역에서 나의 설렘도 갈아탔으며 생일에 이벤트가 열렸고, 밤마다 굿 나이트 인사를 나누었으며, 좋아하는 책을 주고받고 음악 취향을 공유했다. 나는 너로 인해 말보로 레드와 일렉트릭 기타와 부라더 미싱을 알았고, 너는 나로 인해 데미안과 그 외 문학과 철학책, 로맨스 명작과 피스타치오 아몬드를 알았을 것이다. 너와 나의 세계가 만나 우리는 상당 시간 그 확장된 세계를 남방 큰 돌고래처럼 나란히 헤엄쳐 다녔다.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완전한 사랑이 되지 못하는 감정의 틈을 쓸모없는 질투로 채워 넣어 미숙한 사랑을 드러내는 미완의 결말을 써나가기 전까지.    

  

문제는 미완의 결말은 버려지지 못한 책과 같다는 것이다. 완성된 결말로 맺어진 책은 그 쓸모를 다해 깔끔하게 굿바이 할 수 있지만 버려지지 못한 책은 완벽한 이별을 고하지 못한 채 어떤 쓸모의 정당성을 인정받기를 기다리며 목을 빼고 있는 것 같단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 내가 좋아하는 이 제주 바다 앞에서 너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라면 받침만큼 정도의 쓸모라도 찾으면 그 빛바랜 낡은 미완의 책을 저 바다에 던져 버릴 생각으로 너의 쓸모에 대해 생각한다.      


너의 두 번째 쓸모는 커플링을 선사했다는 것이다. 너 이후에도 몇 사람을 더 사귀었지만 목걸이, 귀걸이를 선물 받았지 링을 선물한 건 네가 유일무이하다. 그 흔한 결혼반지도 내겐 없으니 너로 인해 링 하나 없는 여자로 혹여나 오늘처럼 흐린 날 찾아오는 우울감에서 해방되게 해 줘서 다행이다. 아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날은 아직도 생생해. 대학로 모퉁이 금은방에 네가 내 손을 잡고 들어가 며칠 전 이미 맞춰 놓은 반지를 찾아 내게 건네주며 행복해하던 그 모습 말이야. 그리고 금이 아닌 은이어서 조금 미안해도 했었지. 그 반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가끔 마음 내킬 때 끼기도 한다는 사실은 너의 쓸모를 충분히 증명하고도 남겠다.    

 

너의 세 번째 쓸모는 없어. 다만 너의 가장 큰 쓸모는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어. 너와 함께 했던 수많은 시간 속에서 단 한순간을 꼽으라면 분명 이 순간일 거야. 내가 회사에서 잘린 날, 부당하게 부려 먹고 자기 공으로 돌린 불합리한 상사를 실컷 욕해주며 세상에서 내가 제일 똑똑하다고, 내가 회사에서 제일 일을 잘했다고 목청껏 말해주던 그날의 위로. 그토록 내성적인 네가 그토록 내 편을 들어 진심으로 외향적이 되었던 날. 나는 그때 정말 내 편이 있구나. 외로워도 슬퍼도 네가 내 곁에 있구나 느꼈어. 참 따뜻했어. 그 이후로도 무수히 많은 날들, 실패와 좌절로 자존감이 바닥인 날들에 나는 그날의 위로를 떠올려. 유통기간이 한참 지난 통조림을 버리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고 비난하지는 말아 줘. 버려지지 않는 것들은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 유통기한이 없는 내 삶의 쓸모 상자에 보관된 너의 위로. 서울에서 상처받은 나에게 제주에서 꺼내 보는 너의 위로. 내가 필요할 때 참 쓸모 있는 위로다. 그리고 생각한다. 너에게도 내가 어떤 쓸모가 있었을까? 이 글을 본다면 응답해 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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