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아래서
지금 여기 이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거야
깊은 밤, 휴휴암의 어두운 밤바다 위에 내리비친 대낮 같은 달빛 아래서 그는 말했다. 그는 나를 보았다. 나도 그를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나란히 달빛 아래 한참을 서 있었다. 입맞춤을 하기에 최고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밤바다 위에 황홀한 달빛에 더 강하게 취해 있었다. 우리가 만약 서로에게 풍덩 빠졌더라면 달빛은 아름다운 로맨스의 무대가 되어주었겠지. 하지만 우리는 무대 위 주인공의 자리를 달빛에게 내어 주고 뒤에 물러서 있었다. 인생은 늘 그렇게 최고의 타이밍을 비껴가는 거였지.
최고의 로맨스 타임에 빠져들 만큼 서로에게 끌리지 않았기 때문인지, 끌릴 만큼의 외모와 조건을 갖추지 못한 때문인지, 누구 하나 끌렸으면서도 서로의 간을 보며 선뜻 다가가지 못한 망설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 순간 그 모든 이유를 집어삼킬 만큼, 달빛이 너무 강렬했는지 이유를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만약 그와 내가 사랑하는 사이였으면, 그 순간의 감정이 넘쳐흘러 그 순간의 기억에 감정까지 더 깊게 내 영혼의 순간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달빛 아래서 그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내 곁에는 그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혼자가 아닌 둘이 그 순간에 존재했다는 것. 의미는 거기에 있었다.
그와 내가 여행을 함께 떠나게 된 계기는 아주 우연이었다. 신림역 근처 호프집에서 맥주를 마시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나는 다음날 혼자 삼척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그 말 끝에 너도 같이 갈래? 가볍게 던진 말을 그는 덥석 잡았고. 그렇게 그는 내 차의 옆자리에 몸을 묻었다. 삼척 앞바다가 보이는 호텔에 혼자가 아닌 둘이 묵을 줄은 몰랐다. 인생은 하루 앞을 모를 일이라고 욕실에서 러닝 차림으로 머리를 털고 나오는 그를 보며 맥주를 홀짝이던 나는 생각했다.
맥주 몇 캔으로 취기가 오른 나는 침대에 누웠다.
불 끌까?
그가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가만히 내 옆에 누웠다.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괜찮아?
그의 손이 내 이마에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그 손은 내 볼을 타고 내려왔다.
손의 온기가 한참을 볼 위에 머물러 갈 길을 헤매고 있었다.
키스해도 돼.
나는 말했다.
그의 몸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그의 쪽을 향해 몸을 틀려는 순간, 그는 몸을 돌려 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천정을 보고 바로 누운 우리 두 사람을 덮친 침묵 속에서 파도소리만이 밀려왔다 밀려갔다.
멀어지는 파도소리와 함께 멀어지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수야, 있잖아. 내가 이다음에 꼭 멋진 남자가 돼서 니 앞에 설게.
네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멋진 남자가 될게. 꼭.
우리는 그렇게 나란히 누워 파도소리에 그 밤이 묻히는 것을 보았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내게 메일을 보냈다. 뜻밖의 여행에 대한 감사의 메시지와 함께 파일 하나가 첨부되어 있었다. 보르헤스의 영원이란 제목의 파일은 영원의 역사에 대한 책을 요약해 놓은 글로 보였다.
그 글의 한 구절에 의하면 삶이란 너무나 가련한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더욱 불멸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어떤 순간은 우리가 붙잡지 못한 채 손아귀에서 빠져나간다. 때로 놓친 순간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다른 선택지에 대한 시나리오를 쓰게 한다. 하지만 그 순간이 영원할 수 있는 건, 바로 그 순간을 붙잡지 못하고 놓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놓쳤기에 가련한 삶이지만 그래서 불멸이 되어 내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존재하는 것인지도.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나는 종종 생각한다.
그는 그가 말하던 멋진 남자가 되었을까.
그랬다면 내 앞에 다시 나타났을까. 그래서 내 앞에 다시 나타나지 않은 걸까.
그를 다시 만나지 않았기 때문에 달빛 아래서의 그 순간이 내게 불멸이 될 수 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