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길 3부작-2. 기억
오랫동안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얼마나 오랫동안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물속에서의 시간은 1분 1초도 영원처럼 느껴졌다. 나는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7시 30분 PM. 2024년 5월 22일. 방수 손목시계가 23년 5월 22일 호텔 수영장의 푸른 물살을 휘젓고 있었다. 순간 1년 전 오늘의 기억이 파편처럼 떠올랐다.
-진짜 방수가 되네?
-그럼 방수시계니까. 당신 수영 배우면 좋겠다는 염원을 담아서 골라봤지.
그녀의 머리칼이 해초처럼 밤의 푸른 수영장 빛 아래서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미안하지만 수영은 안 배울 거야.
-들어와 봐. 당신이 지금 홀짝이는 와인 보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기분이 더 좋다는 걸
알게 해 줄게.
-이 시계, 물속에서 사망 시각을 확인하는 데 아주 유용하겠어.
-당신 물에 빠지게 안 둬. 인어 와이프가 구해줄 테니까.
결혼 1주년 기념여행. 베트남의 풀빌라 수영장, 그녀는 우리의 결혼생활이 영원할 거라 믿고 있는 듯 보였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고 복선을 깔고 싶었지만 그녀가 또 그 말에 꼬리를 달 게 분명하기에 잠자코 있었다.
사실 여행 내내 그녀의 행복한 표정을 바라보는 게 지옥이었다. 빨리 이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 순간이 그녀를 또 다른 지옥으로 밀어 넣는 것이기에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인어처럼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굿타이밍란 게 있을 수 없다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고, 차라리 가장 행복한 순간에 내 배신의 칼을 꽂는 게 잔인하지만 가장 깔끔한 해결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달 전 아내가 이 여행을 제안했을 때 나는 이미 그녀와 만난 지 6개월이나 지나고 있었다. 어쩌면 결혼식 날, 그러니까 22년 5월 22일 결혼식장에 그녀가 찾아왔을 때 그곳을 뛰쳐나오는 게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어떤 게 인어공주에게 덜 잔인한 걸까. 결혼식장일까. 결혼 1주년 기념여행에서 일까. 배신의 칼의 깊이에 대해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지금 내 몸은 얼마나 수면 깊숙이 가라앉고 있는 건가. 아마도 나는 아내의 말을 듣지 않은 모양이다. 지금 이 상황에 헤엄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럼 지금 나는 내가 염원했던 익사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가. 문제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왜 어떻게 지금 물에 빠져 가라앉고 있는지를. 기억은 1년 전 그 날밤 내가 절정의 순간에 배신의 칼을 그녀의 심장에 꽂은 채 멈췄다.
-사랑해, 오빠
그녀가 붉게 달아오른 내 목덜미에 키스하며 귓불에 대고 속삭였다. 나를 끌어안는 그녀의 살결이 너무 매끈해서 하마터면 나도 그녀의 몸 곳곳에 입술을 갖다 댈 뻔했다.
-오빠도 나 사랑하지?
그녀가 이렇게 묻지 않았다면 내 본능을 그녀에게 묻어버렸을 것이다. 대답이 없는 나를 잠시 떨어뜨려 그녀가 바라보았다. 빗소리가 퍼부었고, 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들의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 위로 흔들렸다. 지금이 타이밍이다. 그녀가 이렇게 간절히 원할 때의 표정. 나는 입 속의 날 선 칼을 빼 들었다. 그녀의 심장을 향해 겨눴다.
-나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나는 등을 돌렸다. 그리고 칼날 끝에 맺힌 말들을 이어나갔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결혼식장에서였지만, 아내와 결혼하기 전에 결혼하려던 여자였다고. 그녀의 부모님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그녀는 나를 떠나게 되었고, 그 순간을 견딜 수 없는 나의 대체제로 아내를 택한 것이라고. 그러나 그녀가 돌아왔을 때 나는 나의 온 마음이 실은 모두 그녀에게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이것이 내가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라고.
-나를 사랑한 적은 있어? 한순간이라도?
그녀의 질문은 절망적이었다. 실은, 너와 함께 밥 먹고, 함께 영화를 보고, 함께 와인을 마시고, 함께 잠들고 함께 깨어난 모든 순간 나는 너를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모든 말들이 더 잔인한 거짓말이 될 것 같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아마도 이혼을 했겠지.
아내를 떠난 후, 나는 그녀와 살았을까. 그녀와 행복하지 않았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는 지금 물속에서 가라앉고 있는 걸까. 아내가 권했던 수영을 배웠더라면 이유를 알고 가라앉을 수 있었을까. 나는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했다. 내가 가라앉고 있는 이유, 아내와 헤어진 후 1년, 그 기억이 떠오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