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길 3

떠오르길 3부작-3. 고래

by 데이지

여자와 남자는 고래가 떠오르길 기다렸다. 고래는 그들의 새로운 삶, 원더풀 라이프에 대한 은유와 같았다.

이혼 법정 앞에서 수현과 동진은 담백하게 악수했다. 그 짧은 악수에는 동진의 미안함과 수현의 아직 가시지 않은 분노, 그리고 이 모든 감정은 이제 각자의 몫으로 남겨졌다는 끝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1년의 연애, 1년의 결혼생활이 단 2초의 악수로 끝을 맺었다. 동진과 함께 한 시간들이 신기루처럼 수현의 눈물 앞에서 흔들렸다.


-잘 지내


동진은 수현의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자 짧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수현은 떠나가는 동진의 넓은 등을 바라보며 주저앉았다. 멀어져 가는 동진의 귓가에 수현의 대성통곡이 희미해져 갔다.

끝은 새로운 시작이라고 했던가. 수현은 돌싱임을 선언하고 새로운 남자를 찾아 다시 한번 모험을 떠날 결심을 했다. 결혼정보사이트에 가입하고 소개팅을 하며 6개월을 보냈다. 미친 듯이 동진을 잊어보려고 발버둥 쳤다. 6살 때 처음 수영장에서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쳤던 발버둥만큼이나 격렬하고 절실했다. 그 필사적인 발버둥으로부터 오늘날의 인어가 된 것처럼 동진을 잊으려는 지금의 발버둥이 화려하고 완벽한 새로운 삶을 떠오르게 해 주리라 믿고 싶었다.

-전남편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다섯 번째 나간 소개팅에서 상대남이 물었을 때, 수현은 무너졌다.


-아니, 다른 뜻은 없고, 수현 씨가 어떤 사람하고 안 맞는지 알 수 있을까 해서.

-저랑 아주 잘 맞는 사람이었어요. 어쩌면 너무 잘 맞아서 헤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네?


-너무 잘 맞아서, 헤어지자고 했을 때 너무 충격이 컸고, 그래서 붙잡을 생각을 못했거든요.


-붙잡는다고 잡히는 게 아니죠, 사람 마음은.


상대남의 그 말이 수현의 귓가에 계속 맴돌았다. 전 남편의 마음을 붙잡을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빠르게 합의 이혼을 할 수 있었다.


밤의 거리를 정처 없이 걷던 수현은 횡단보도 앞에 섰다. 거대한 전광판 위로 원더풀 라이프 뮤지컬 광고 영상이 플레이되고 있었다. 화려한 무대 위 주인공 제시카. 전 남편이 사랑한 여자. 동진과 그녀는 사랑을 찾아 원더풀 라이프를 살고 있을까. 수현은 파란 신호등에도 건너지 않은 채 휴대폰으로 그녀의 뮤지컬을 예매했다. 맨 앞줄에서 그가 사랑한 여자, 그를 버렸다가 다시 그를 차지한 여자의 무대를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뮤지컬 어워드 3관왕에 빛나는 제시카는 눈이 부셨다. 수현은 자신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자신 있게 꽃다발을 전해주며 무심하게 건재하는 X-와이프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고 싶었지만 현재 시점에서 그건 단지 판타지였음을 깨닫고 돌아서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 오늘 너무 멋졌어!


수현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동진이 제시카에게 꽃다발을 건네주며 허그를 하고 있었다. 수현은 그 장면을 눈에 똑똑히 박았다. 판타지를 깨고 현실을 직시하고 싶었다.


그의 시체가 떠오르면 수현은 묻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와 행복했느냐고. 우리의 결혼생활은 너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었냐고.


제시카가 찾아왔을 때는 수색대가 철수를 한 후 이틀이 지나서였다. 수현은 짐을 싸고 있던 중이었다. 아직 버리지 못한 결혼사진을 한참 바라보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다행이에요. 떠나기 전에 줄 수 있어서.


제시카는 문 앞에서 한 장의 종이를 건넸다.

-그 사람 유서예요. 당신에게 남긴......


돌아서 가는 제시카에게 수현은 물었다.

-그 사람 정말 죽었어요?


-바닷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겠죠. 소원대로.

제시카의 목소리는 다소 냉소적으로 들렸다.

-왜요? 왜 그 사람을 죽게 내버려 뒀어요? 같이 살면서 행복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건 행복이 아니었어요.


화려했던 무대의 주인공, 제시카는 쓸쓸한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수현에게 말했다.

-그 사람 나랑 살지 않았어요. 당신을 떠나기 위해 거짓말한 거예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제시카는 사라졌다. 그녀를 붙잡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해야 했으나 수현은 머리에 둔기를 얻어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은 것 마냥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지?


수현은 현관에 기대서 제시카가 남긴 종이를 펴 본다. 그의 반듯한 글씨체가 긴 침묵을 깨고 마침내 그녀에게 말하고 있다.

--네가 이 종이를 펼쳤을 때 나는 아직도 살아서 바다 깊숙한 곳에서 물고기들과 대 화를 하고 있을지 몰라. 생각보다 목숨은 질기고 난 수영을 배웠거든. 네가 말한 대로 와인의 취함을 능가하는 자유로움을 느꼈어. 죽기 전에 수영의 맛을 알 수 있게 되어 좋았어. 수영을 잘한다고 꼭 물속에서 살아남으리라는 생각이 오만이라는 걸 깨달았어. 죽음에 대한 나의 의자가 확고하다면 수영해서 생존하려는 본능을 꺾을 수 있다고 말이야. 이건 또 무슨 궤변인가 싶지? 내가 너를 좋아한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나의 궤변을 잘 이해해 줘서야.

물속에 떠 있으면 너와의 기억들이 하나둘 떠올랐어. 그래서 네가 그리울 때면 물속으로 뛰어들었던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정말 그 기억들과도 안녕을 말해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암 덩어리들이 내 삶을 끝으로 몰고 있어. 우리가 결혼한 후 6개월이 지났을 때쯤 암진단을 받았어. 혼자 고군분투해 봤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더라고. 너에게 암과 한 몸이 된 나의 끝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병원 침대에서 내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내가 죽고 싶은 곳을 떠올렸어. 내가 좋아하는 제주도 바다 심연이 떠올랐어. 그렇게 된 거야.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내 죽음과 함께 했던 물고기들, 혹은 내가 특히 사랑한 남방 큰 돌고래가 떠올라 나에 대한 이야기를 너에게 전해줄지도 모르지. 내가 물속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들. 나의 마지막 모습이 얼마나 멋졌는지에 관해서. 이 모든 게 궤변처럼 들릴 거야. 너에게는, 아마도. 제주도 앞바다에 고래가 떠오르면 나의 궤변을 떠올려줘. 안녕.


시체가 떠오르길 기다리던 여자는 고래가 떠오르길 기다린다.

기억이 떠오르길 기다리던 남자는 고래가 떠오르길 기다린다.

삶과 죽음은 언제나 매 순간 떠올랐다 사라진다.

이제, 빛나는 당신의 순간이 마침내 떠오르길.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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