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을 수 있다면
시아는 기차역 플랫폼에 도착했다. 어느덧 여명이 걷히고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끌고 온 캐리어를 옆에 두고 플랫폼의 끝을 바라본다. 멀리 눈 덮인 산이 제법 근사해 보인다. 산의 정상 부근은 짙은 안개로 휩싸여있었다. 지금 자신의 인생은 안갯속으로 들어가는 것인지 빠져나오는 중인지 알 수 없었다. 오리무중의 세계를 뚫고 기차의 도착 알림음이 울렸다. 기차가 멈추고 시아는 플랫폼을 한 번 휘 돌아보았다. 잠시 집 생각이 났다. 가스 밸브와 보일러 전원을 잘 끄고 왔던가. 확실하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에는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 다시 집으로 들어가 한 번 더 확인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멀리 와 버렸다. 오늘은 가스 밸브나 보일러보다 더 중요한 확인의 필요들이 있었다.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시아는 핸드백에서 하얀색 봉투에 든 초대장을 꺼내 다시 펼쳐본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죽게 해 드립니다.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곳-
생의 마지막 안식처, 케렌시아로 초대합니다!
생의 마지막행 기차에 오른 소감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시아는 그저 덤덤하다고 말할 것이다. 갈등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오히려 기차에 오르기 전까지 갈등의 순간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텅 빈 집 안을 돌아보면서도. 마지막으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면서도, 엘리베이터에서 위층 할머니의 잘 다녀오라는 말 한마디에서도 시아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디 여행가나 봐, 날 추운데 어딜?”
“네, 어디 좀...”
“참, 집의 강아지는 어떡하고? 내가 봐줄 수도 있는데...”
“코코, 저희 집 강아지 죽었어요.”
“쯧쯧 저런... 어쩌다가... 마음 잘 추스르고, 여행 잘 다녀와.”
마지막은 왠지 애틋해서 성의를 다하게 되는 것 같다고 시아는 생각했다. 자신이 할머니의 질문에 이렇게 성심성의껏 대답한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기차는 빠른 속도로 케렌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케렌시아의 신청이 승인된 것은 2주 전이었다. 그 사이, 시아는 퇴사를 하고 짐을 정리했다. 40년 인생을 정리하기에 2주는 좀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40년 인생을 살아온 것에 비하면 버거운 축에도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시아에게 죽음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스무 살 때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다 잃고 혼자 남겨졌을 때 이후 줄곧 시아는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단지 죽음의 방식에는 어려움을 느꼈는데 스위스의 조력사를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했지만, 시한부라는 운명이 자신에게 찾아와야 가능한 것이기에 그것 또한 어려웠다. 그런데 6개월 전 우연히 인터넷에서 케렌시아 광고를 보게 되었고, 약 3개월의 복잡한 서류 심사와 화상 인터뷰 등의 절차를 거쳐 2주 전 최종 승인된 것이다.
시아가 케렌시아에 강하게 끌린 것은 코코의 죽음이 큰 영향을 미쳤다. 서른 살에 만난 남자친구가 선물한 강아지 코코는 시아와 10여 년을 함께 살았는데 시아와 산책 중 잠시 한 눈 판 사이에 사라졌고, 밤낮으로 코코를 찾아 헤맸지만 결국 코코는 죽어서 시아의 품에 안겼다. 코코와의 이별은 남자친구가 자신을 떠났을 때보다도 훨씬 더 큰 충격이어서 이후로 시아는 삶의 모든 의욕을 잃어버렸다. 특히 아주 오랫동안 미각이 돌아오지 않아 한 달 새 10킬로그램의 체중 감소가 있었다. 자신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 코코를 잃고 시아는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것 같은 상실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인터넷에서 온갖 죽음의 방식을 찾다가 마침내 케렌시아를 만나게 되었다. 케렌시아의 최종 승인이 되고 시아는 몸도 마음도 신변도 모든 게 가벼워져서 공중부양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차가 케렌시아로 가까워질수록 정말 이대로 죽을 수 있을까. 죽게 되는 건가. 무거운 생각들이 들이닥쳤다. 때마침 창가로 빗줄기들이 들이닥쳤다.
얼마나 잤을까. 아무런 꿈도 꾸지 않고 이렇게 달게 자다니, 그것도 죽으러 가는 순간에. 어느새 비는 그치고 시아의 얼굴에 쏟아지는 강렬할 햇살에 눈을 떴다. 시아는 캐리어를 끌고 케렌시아를 향해 걸었다.
로비에 도착하니, 시아 외 스무 명 남짓의 사람들이 저마다 캐리어와 짐들을 옆에 차고 소파에 앉아서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얼마 후 매니저가 무리 속으로 다가와 입을 열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에 죽음을 맞이하는 곳,
케렌시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이 문을 열고 들어온 여러분들은 절대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곳에서는 단 두 가지의 선택만이 있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든지, 당신이 죽음을 마음먹게 한 그 현실로
다시 돌아가려다가 죽든지!
쿡쿡. 한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매니저의 표정은 굳어졌다.
-이것은 농담이 아닙니다. 죽음이 농담이 아니듯이 말이지요.
이점 숙지하시기를 다시 한번 당부드립니다.
저희는 이제 당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드릴 것입니다.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앞으로 일주일 동안, 생각의 시간을 드릴 것입니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찾기 위해 담당 매니저와 매일 상담을 하게 될 것입니다.
담당 매니저와 연락처는 배정되는 숙소에 가시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으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여기까지 질문 사항 있으십니까?
-저기, 케, 케레샤가 도대체 뭔 뜻이랴?
초로의 할아버지가 손을 들어 물었다.
-스페인어로 ‘안식처’라는 의미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재현하여
그 순간에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가상의 공간입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행복했는지 입력한 데이터값을 토대로
그 순간으로 여러분을 다시 돌아가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은 이만 각자의 숙소로 가셔서 편히 쉬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겐 일주일의 시간이 있으니, 차차 더 얘기 나누기로 하지요.
숙소 키를 받아 들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시아의 방은 3층에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시아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열린 커튼 사이로 커다란 창문을 통해 펼쳐진 산의 풍경이 마음에 들었다.
눈으로 덮인 산에 안개는 없었다. 자신의 죽음이 이렇게 쾌청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시아는 테이블 위의 종이를 들어 자신의 담당 매니저 이름을 보았다.
이름 옆에는 사진이 붙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시아의 전 남자친구가 무표정하게 박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