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삶과 행복한 죽음 사이
다음 날 오전 10시경 사람들은 로비에 다시 모였다. 시아도 그 무리 속에 섞여 방에 놓여 있던 사진 속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도 밤에 잠을 잘 이룰 수가 없었다. 낯선 잠자리 환경도 그렇지만 삶의 현장에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태우고 자르고 작별하고 이곳에 왔는데 여기서 한 때 사귀었던 옛 남자친구를 만나게 된다면 어쩐지 그간의 모든 정리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허탈한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매니저들이 로비로 들어왔다. 어제의 책임 매니저가 담당 매니저들을 소개했다. 시아의 눈은 사진 속 남자를 분주하게 찾고 있었다. 책임 매니저가 웅성대는 장내를 정리하며 입을 열었다.
-자, 주목해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이곳에 왜 오셨지요?
일순간 모두 조용해졌다.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가장 행복한 순간에! 어떤 순간에도 목적을 잊으면 안됩니다. 이곳은 친목을 쌓기 위한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친해질수록 죽음은 더욱 당신의 발목을 잡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서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삼가 주십시오. 누군가와 영향을 주고받는 일, 자극을 나누는 일, 관계를 만드는 일의 단초도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의 계획에 차질을 빚을 수 있으니까요.
찾았다. 시아는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 책임 매니저가 서 있는 뒤 두 번째 줄 오른쪽 끝에 서서 시아를 보고 있는 진혁과 눈이 마주쳤다.
-오직 여러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찾는 것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의 인생을 반추하고 생각하고 뒤돌아보고 찾아내야 할 것입니다.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말이죠.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배정된 담당 매니저뿐입니다. 자 그럼, 여러분을 찾아가는 담당 매니저와 함께 행복한 순간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십시오. 최고의 안식은 자신과의 대화 속에서 행복한 순간을 찾는 일입니다.
책임 매니저는 자리를 뜨고, 참여자와 담당 매니저 둘씩 짝을 지어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진혁아
방에 들어가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시아는 먼저 입을 열었다.
-여기서는 매니저님이라고 불러야 해.
진혁은 소파 맞은편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왜 죽으려고 해?
진혁이 훅 치고 들어왔다. 진혁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늘 은유를 섞어 돌려 말하는 시아와 달리, 이렇게 늘 상대가 방어할 새 없이 훅 들어오는 그 말버릇은 여전했다.
-... 넌, 넌 여기서 왜 매니저를 해?
-나도 여기 죽으러 왔었어. 2년 전에. 근데 진짜 행복한 순간을 찾았고, 죽으려니까 너무너무 살고 싶어지는 거야. 그래서 도망을 쳤는데 십 리도 못 가서 잡혔네. 목숨값 대신 종신 매니저를 하고 있는 거야.
-마치 농담 같네. 너 우리 만날 때도 농담 참 많이 했잖아. 알쏭달쏭한 말들...
-대답해. 네가 왜 죽으려고 하는지...!
-삶의 이유를 모른 채 살아왔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 같더라.
코코와 산책하는데 코코를 잃어버렸고, 주검으로 돌아왔어. 마침내 온 우주에서 모든 의미가
사라진 것 같아. 알잖아. 어차피 난 부모님 돌아가시고 스무 살 때부터 삶의 의지가 꺾여
있었던 거.
-이시아, 그래도 나랑 함께 지낼 때 너 행복하지 않았어?
-그랬지. 넌, 넌 왜 죽으려고 왔는데...?
-너랑 맺어지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또또! 농담이 인생인 새끼.
-근데, 너 왜 나 버렸냐?
사뭇 진혁의 눈빛이 진지해 보였는데 진혁의 허리춤에 무전기가 울렸다.
-남진혁 매니저, 사담은 이쯤 하죠. 매뉴얼 대로 진행하세요. 첫 번째 경고입니다.
진혁은 가지고 온 패드를 열고 자세를 정돈했다.
-이시아씨, 당신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 코코가 사라지기 전에 행복했어요.
그 행복을 그들이 사라진 후에야 알았죠. 불행한 삶 한 복판에 섰을 때 비로소
행복했던 순간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였죠.
-그럼 그중에서 단 한순간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면 어느 순간일까요?
-그건 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말이죠. 가장 행복했던 순간에
죽는 것이 불행한 삶보다 나은 걸까요? 남진혁 매니저님?
-글쎄요... 저도 죽음이 임박했을 때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행복했던 순간에 죽으려니까
너무 억울한 거예요. 막 살고 싶고요. 근데 또 돌아가면 다시 또 불행해 질 것 같고요.
불행한 삶과 행복한 죽음, 그 사이의 딜레마가 케렌시아에서 당신의 마지막 난제가 될 거예요.
-불행한 삶과 행복한 죽음 사이의 딜레마...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행복했던 세 가지 순간에 대해 내일은 좀 더 깊이 파고 들어가 보죠.
편안히 쉬십시오. 내일 뵙겠습니다.
진혁은 패드를 접어 문을 닫고 사라졌다. 시아는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노트를 펼치고
<내 인생의 행복했던 세 가지 순간들>이란 제목으로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