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렌시아 3

불행 속에서 행복은 발톱을 드러낸다

by 데이지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에는 늘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었다. 스무 살 때까지 물리적, 정신적으로 나를 키워주셨던 부모님. 그들이 교통사고로 나를 떠난 후, 그 비존재함의 상태 속에서 나는 상상할 수 없이 감당하기 어려운 삶을 지속해 왔다. 물론 부모님의 물리적 부재는 역으로 정신적 존재성을 더 강하게 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곁에 실재하지 않는 부모님이란 쉽게 극복될 수 있는 날들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상 속에 혼자 남겨져 고아가 되어버린 나는 그제야 부모님과의 행복했던 시간을 발견했고, 그 시간 속을 헤매며 자주 그리움을 삼켰다. 결코 부모님의 존재도 함께 한 시간들도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명명백백한 사실만이 하루하루 나를 무너뜨렸다.


서른 살에 남자친구 남진혁을 만났다. 그는 부모님처럼 혈육은 아니었지만 혼자 남겨진 나에게 매우 가까운 존재로 곁에 머물렀다. 아침과 저녁으로 나를 보러 와 주었으며 나의 밥과 잠과 외로움을 살뜰히 챙겨주었으며, 의기소침했을 때는 마음으로 위로를 건네주었고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항상 먼저 달려와 손을 잡아주는 유일한 존재였다. 어쩌면 그때 나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모래성 같은 믿음을 스스로 쌓고 있었던 것 같다. 1%의 틈도 없이 그를 향한 나의 믿음은 견고했기에 그가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 99% 그 이상의 균열로 마음은 갈기갈기 갈라졌고, 균열은 곧 커다란 공동(空洞) 속으로 그에 대한 나의 믿음을 한없이 추락시켰다. 그때 알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틈이 없으면 그 관계는 숨을 쉴 수 없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두려움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삶 속에 찌들어서 나는 관계의 거리 두기를 이해하고 실행할 의지가 박약했다. 오직 내 곁에 있는 존재의 실재함을 소유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것 같다. 그것은 오직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확증편향의 최고조의 상태에 나를 올려놓았고, 남진혁이 어째서 다른 여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는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을 변명으로, 전후 맥락을 자세히 재현하는 장면을 구구절절 말할 때는 단지 위기를 모면하려는 거짓말로 오해해 버렸고, 급기야 그가 나에게 행했던 따뜻한 위로와 사랑의 행동들까지 모든 것을 가짜라는 오명으로 뒤집어 씌워 그를 나의 삶 속에서 영영 쫓아내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진혁은 혼자 남겨질 나를 위해 코코를 선물했다. 나는 코코를 나의 마지막 가족으로 여겼고, 역시 지나친 애정을 주어서 녀석이 잠시 나를 벗어나 사라져 버렸다가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는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쉼 없이 써 내려가던 시아의 펜 끝이 갑자기 멈추고 글자 위로 커다란 눈물방울이 툭 떨어졌다. 시아는 행복했던 순간에 죽는다는 일이 결국은 가장 불행한 죽음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시아는 부모님과, 남진혁과, 코코와 함께 했던 시간들이 행복이었는데, 그 순간에 자신의 죽음은 역시 남겨진 이들에게 지금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과 불행의 고통을 선사하게 될 텐데 과연 그 순간의 죽음이 행복한 순간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 속에 갇히고 말았다.


-이시아 고객님, 이건 현실이 아니라 가상이에요. 남겨진 자들이 느끼는 상실감과 불행의 고통은 일어나질 않을 일이란 거예요. 너무 깊게 들어가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해요. 단지 가장 행복한 순간에 죽는다고. 그뿐이라고.


-하지만 내 행복의 원천 중에 남진혁 너는 존재하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떠나면 너는 어떨 것 같아?

-그것 또한 과거형이야. 우린 이미 서로를 떠나 있다고. 10년이나 전에.


-아, 그렇지... 그렇구나... 그런데 내 인생의 행복한 순간을 찾으라는 미션을 수행하다 보니 10년이 어제 같고 오늘이 어제 같고 내 40년 인생이 일렬횡대로 세워져 한순간에 단일 구조로 내 앞에 한 덩어리가 되어 모여든 느낌이야.


진혁의 허리춤에 있는 무전기에서 신호음이 들렸다.

-매니저와 내담자 사이에 반말은 불가합니다. 언어 사용에 유의해 주십시오.

두 번째 경고입니다. 세 번째 경고 시에는 매니저가 변경될 예정이니 이 점 참고해 주세요.


진혁은 시아의 어깨를 잡고 자세를 정돈시켰다. 시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시아 고객님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단 한순간은 무엇입니까?


시아는 자신과 진혁 사이에 스며든 한 줌의 햇빛을 바라보았다. 그들 사이에 적당한 거리만큼, 적당한 온기를 품은 온화한 빛이었다.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불행했던 것 같아. 또 한편으로 살아 있는 모든 순간이 행복했던 것 같기도 해.

코 끝이 빨개진 시아의 눈에서 40년 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진혁은 테이블 위의 티슈를 뽑아 시아에게 건넸다. 그리고 셔츠 속에 품고 있던 사진 한 장을 시아에게 건넸다. 사진 속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부부가 공원 벤치에 기대앉아 햇살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손을 꼭 잡고 있었다.

그제야 시아는 10년 전 그 공원 벤치에서 노부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에게 했던 말이 생각났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그 순간의 기억이 바로 오늘 일처럼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우리도 저렇게 나이 들어서 함께 공원에 앉아 오후의 적당한 온기를 지닌 햇살을 손 꼭 잡고 즐길 수 있다면 그게 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일 것 같아.


시아는 남진혁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건넸다.


-내가 너의 곁에 오래오래 존재해 주는 것. 네가 내 곁에 오래오래 존재해 주는 것.

그래서 함께 오래오래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하는 것!


남진혁은 시아를 바라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진혁은 가지고 온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노부부의 뒷모습을 찍었다. 어느덧 빛이 잦아들고 일몰의 장관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때 폴라로이드 사진이 선명해졌다. 남진혁은 사진을 시아에게 보여주고선 품속에 고이 넣었다.


-나 안 주고 네가 갖는 거야?


의아한 시아는 물었고, 남진혁은 대답했다.


-언젠가, 네가 행복의 의미를 잃어버렸을 때 그때마다 꺼내서 보여줄게.


진혁은 사진을 시아에게 건넸다. 시아는 사진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어느덧, 케렌시아의 하루도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밤이 찾아왔다. 그 밤은 깊어졌고, 그 깊은 밤이 100% 고요해졌을 때 시아의 방에 노크 소리가 작게 들렸다. 시아는 문을 열었다.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시아는 진혁의 손을 잡았다.

집으로 돌아가면 먼저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가스 밸브와 전기 스위치를 열고, 커피를 내리고 오후에 들어오는 빛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맛있는 수제 쿠키를 사서 위층 할머니를 찾아가 여행 잘 다녀왔노라고 성심성의껏 인사를 건넬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과 나의 삶에 죽을 때까지 존재하리라 시아는 다짐했다. 진혁의 손을 꼭 잡은 시아는 한밤의 케렌시아 운동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삶 속으로 질주해 나아갔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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