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은 곧 사라질 테니까
- 커피?
탕비실에 들어서는 미선에게 장대리가 물었다. 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대리는 막 내린 커피를 미선에게 건넸다.
-아니에요. 제가 내려 마시면 돼요.
S는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이것도 선 넘는 건가?
-그럼 이건 내가, 땡스~
어디선가 나타난 최대리가 커피를 가로채며 물었다.
-근데 누가 무슨 선을 넘는다는 거야?
-선은 최대리님 네가 넘었지? 본부장님한테 야자타임이 뭐니?
캡슐커피를 머신에 넣고 추출 버튼을 누르는 장대리의 긴 손이 최대리의 정돈된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우이씨. 내가 아침에 얼마나 정성 들여 만진 머린데.... 장대리 너 은근히 스킨십 장난 아냐? 혹시 취향이 바이냐?
장대리는 내려진 커피를 미선 쪽 테이블에 내려놓고 미선에게 권하는 손짓을 한다. 그리고 캡슐을 하나 더 넣는다. 장대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잔을 들고나가는 미선에게 최대리는 말한다.
-미선대리, 이 새끼 조심해요. 함부로 선 넘는 놈이니까. 우리 셋 다 동기고 동갑이라는 이유로 미선대리는 싫다는 데도 지 혼자 말 놓는 것만 봐도 쌍방예의가 없는 놈이라니까요.
-너야말로! 아무리 대학동기라지만 회사에서 너무 막말 지껄이지나 말아라. 본부장님한테 어제일 사죄하고!
사죄. 미선은 그에게 사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사죄를 받아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미선은 커피를 들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어젯밤은 수십 번 곱씹고 곱씹어도 미스터리한 밤이었다. 신입사원 회식이 뷔페 레스토랑에서 있었고, 샐러드를 접시에 담아 발사믹 오일 소스를 뿌리려는데 갑자기 주위가 어두워졌다. 정전. 웅성대는 소리들. 암흑에 꼼짝없이 갇혀 샐러드 접시를 간신히 바닥에 내려놓는데 갑자기 누군가 미선의 손을 낚아챘다. 그 손에 이끌려 부지불식간에 암흑 속을 헤쳐 당도한 곳은 암흑보다 더 어두운 식당 뒤쪽 복도 끝. 묵직한 벽에 미선은 밀쳐 세워졌고, 곧이어 부드러운 입술과 그 안의 긴 혀가 미선의 작은 입 속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그 순간 미선은 안톤 체호프의 소설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이 남자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고 이러는 걸까. 밀쳐내고 소리치고 발로 차고 달아나야 할 텐데... 아무런 저항 없이 남자를 받아들이고 이 순간에 빠져 있는 미선을 미선의 또 다른 자아가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화려한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미선은 불꽃의 황홀경에 취했다. 남자의 긴 손이 미선의 꽃무늬 원피스 속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남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한 마디.
-미영아!
그것은 분명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고, 이 소리는 분명 자신이 흠모하던 장대리의 목소리였다. 미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불이 켜지기 전에 빨리 도망쳐야 한다. 남자의 불꽃 속에 던져 버린 자신을 들켜버리기 전에. 미선은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달렸다. 긴긴 어둠을 뚫고 달리고 또 달렸다.
화장실 세면대 앞에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미영이 옆에 서서 손을 씻는다. 미선은 장대리가 부르던 미영을 보고 있었다. 시선을 느낀 미영이 미선을 보며 묻는다.
-미선대리님, 나한테 할 말 있어요?
-응? 아니요.
-어제 몸 안 좋으셔서 일찍 가셨다고 들었는데 혹시 저랑 같은 원피스 입고 오셔서 가신 건 아니죠?
-네? 아... 그렇다기보다... 저, 미영님!
-네?
-사귀는 사람 있어요?
-갑자기요? 음... 좋아 죽겠는 사람은 있어요.
이건 정말 비밀인데 우리 회사 사람이에요.
미선의 귀에 속삭이는 미영은 정말 좋아 죽겠는 표정을 지었다.
-미영님, 그 사람 좋아하면 안 되는 사람이잖아요.
-미선 대리님, 누군지 아는 거예요?
-그런 것 같아요.
-비밀 지켜줘요. 저도 안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봤는데 좋아하는 마음은
사람 조건 따라 사라지는 게 아니더라고요.
-하지만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면 선을 넘어버리는 거잖아요.
-그니까요. 선을 넘어야 연애가 시작되죠. 미선대리님도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선을 넘어 보세요!
미영은 연애하는 사람의 생기 가득한 발랄함을 남긴 채 총총 사라졌다.
화장실 앞에서 미선은 장대리와 마주쳤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미선의 팔목을 붙잡는 장대리에게 미선은 작은 떨림을 느꼈다.
-미선대리, 오늘 점심 나랑 같이 할래요? 할 얘기도 좀 있고.
-다음에요.
미선은 빠른 걸음으로 도망쳤다. 자신의 심장소리를 들킬까 덜컥 겁이 났다. 아직은 장대리와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장대리가 어젯밤 자신의 욕망의 상대가 미선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용기가 나지 않았다. 미선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정리가 필요했다. 3년 전, 첫 출근하는 날 장대리의 눈에 띄는 외모에 끌렸고, 그의 붙임성과 유연함, 외향성이 낯설었지만 점점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일에 몰두할 때 코끝과 미간이 찡그려지는 그의 표정에 사로잡혔고, 점점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지만 어느 날 그가 기혼자라는 사실을 알았을 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좋아하는 마음을 고백하지 않아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던 장대리를 향한 마음의 굴곡진 역사가 어젯밤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서 자신은 지금 주체할 수 없이 당신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고 다 토해내 버릴까. 지난 3년간 기혼자인 당신에게 선을 넘지 않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다 털어놓아 볼까. 미선은 스크린 세이버가 돌아가는 모니터를 넋 없이 바라보다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자리를 떴다. 혹여라도 장대리와 마주칠까 두려움에 떨면서.
하루 종일 어젯밤과 장대리에 대한 생각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던 미선은 마감 기한이 내일인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야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텅 빈 모니터를 바라보며 미선은 오늘의 어지럽던 생각을 정리해 본다. 우선 팩트 위주로 요약해 본다. 어젯밤 일은 미선의 자의에 의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선을 넘은 건 타의에 의해서다. 그래서 자신의 선을 지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미선의 삶의 원칙이 깨진 것은 아니다. 조각난 마음은 차차 스스로 내부적으로 수습하면 된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선은 어젯밤을 마음의 보자기에 싸서 단단히 봉인했다. 그리고 해제할 수 없는 비밀번호를 걸어두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았다. 그리고 보고서를 쓰기 시작했다.
자정 무렵, 보고서도 결론만 남겨 놓고 있었다. 미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탕비실로 향한다. 캡슐커피를 넣으며 오늘 아침 장대리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걸 막아보려 고개를 흔든다. 그때, 탕비실의 불이 꺼진다. 정전 그리고 암흑. 미선은 숨이 턱 막힌다. 공포에 질려 있는 마음 사이로 발걸음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두려움. 미선은 자신의 몸이 완전히 굳어 있는 것을 느낀다. 그 몸을 뒤로 안는 양팔의 촉감과 목소리가 들려온다.
- 미선씨, 나야, 장대리
미선은 막혔던 숨을 탁 내쉰다.
- 뭐예요?
미선은 장대리의 팔을 풀려고 하지만 풀어지지 않는다.
- 빨리 불 켜요!
오늘 밤은 어젯밤처럼 저항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미선은 생각했다. 어젯밤과 오늘 밤 자신의 의지와 행동은 달라야 한다고 스스로 각인시켰다. 그래야만 자신이 굳건히 지켜온 선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어젯밤!
장대리의 달콤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젯밤은 실수였지만 오늘 밤은 아니야!
미선은 선을 지키기 위해 선방을 내뱉었다. 단호하고 강력하게. 장대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데 장대리의 입술이 미선의 입술을 덮쳤다. 미선은 장대리를 밀어내고 따귀를 날렸다. 어둠 속에서 장대리의 고개 숙인 실루엣이 드러났다. 장대리는 몸을 돌려 발걸음을 옮겼다. 잘했다. 미선은 돌아서는 장대리의 뒷모습을 보며 스스로를 칭찬했다. 기혼자에 바람둥이에 욕망만 쫓는,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남자에게 자신의 자존심을 넘겨주지 않고 떠나보내고 있는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장대리는 탕비실의 불을 켰다. 전원 스위치에 닿은 그의 긴 손과 긴 팔, 그리고 하얀 얼굴, 흐트러진 머리가 불빛에 드러났다. 미선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둔 채 돌아서는 장대리에게 미선은 달려갔다. 스위치를 내리고 장대리의 입술을 덮쳤다. 어둠 속에서 불꽃이 터졌다. 미선은 불꽃놀이에 빠져들었다. 미선의 또 다른 자아가 미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색색의 선들이 우주를 수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