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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터닝 포인트

by 문득 달

였다. 이혼은.


전남편은 내가 그의 외도를 의심할 때마다 정색하며, 나를 의부증으로 몰아가며, 늘 말했다.

"잘 봐, 이게 네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거야."




터닝 포인트라는 게,

인생이나 사건에서 중요한 전환점, 즉 상황이나 방향이 바뀌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하는데,

원래 물리학에서 방향을 바꾸는 지점이라고 한다.

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지점.

그것은 이혼이었다.

그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전남편말대로 전남편의 외도로 이루어졌다.

시기는 좀 달랐지만.


전남편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운운했을 때는 그의 외도를, 전남편의 무시를 참아내느라 고역이었지,

그것을 기회로 삼을 생각은 못했다.

나는 어떻게든 외도 증거를 잡고, 그는 어떻게든 그 증거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변명하고,

사소한 것들 하나하나가 의심 가는 정황에서 나는 신경을 곤두세웠고, 전남편은 그런 나를 의부증으로 몰아가고 답답해했고, 나는 무용지물이 아닌 새로운 증거를 찾아내야 하고... 그 길은 쉽지 않고...

알면서도 속고, 속으면서도 계속하는 지옥 속에서 살았다.


물론, 전남편에게도, 그런 삶은 지옥이었을 것이다.

부인과 아이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만나야 하고,

부인은 뻔히 다 알고 있고, 증거를 없애야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야 하니,

얼마나 머리 아프고 속 편치 않은 날들이었을까.

(실제로 언젠가부터 전남편은 1번을 만나고 온 다음에는 얼굴이 시커메져서는 매번 체했다. 그럼 1번을 안 만나면 되잖아? 그 당연한 걸 못했다. 그걸 '어쩔 수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했을까? 어느 드라마의 말도 안 되는, 유명한 대사처럼 '사랑이 죄는 아니잖아!'라고 생각했을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전남편이 의도한 '네 인생의 터닝 포인트'는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별생각 없이 나를 협박하기 위한 말이었을지 모르겠다.

나는 그 정도의 단어로도 쫄아버리는 '쫄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를 의심하다가는 너 아이도 못 키우고 이 집에서 쫓겨나고 말 거야. 그러면 아이가 엄마 없이 자라야 하는데, 너, 괜찮겠어? 안 되겠지? 그러니, 너는, 나를 의심도 하지 마. 그냥 내가 바람 펴도 그런가 보다 해.'

이 정도의 협박이 '네 인생의 터닝 포인트' 4 어절에 함축되어 있었다.


그때 끝냈다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조금 더 일찍 찾아왔을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 시기는 내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더 잘 맞이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기를 보내지 않았다면,

그때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나는 나를 바로 보지 못했을 것이고, 지금도 고통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행복과 불행은 한 끗 차이이다.

동전 앞면에는 행복이, 동전 뒷면에는 불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동전의 어떤 면이 나오든, 행복과 불행은 정해져 있다.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 아니다.

결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생각하기 나름.

원효대사가 당나라 유학길에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는 경험에서

"모든 현상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깨달음을 얻었듯이.


모든 것은 마음먹기 나름.

이혼은 나를 불행이 아닌 행복으로 데려다주었다.


언젠가 내가 가장 아끼는 지인과의 대화에서 지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언니, 언니가 이런 일을 겪고도 언니 자신을 잃지 않아 줘서 너무나 고마워."


나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돌싱녀'다.

나는 '작은 천사와 함께 사는 싱글맘'이다.

나는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는 철없는 딸'이다.

나는 '이런저런 시간을 보낸 나'다.

나는 '열심히 나를 만들어 가는 나'다.

나는, 그런, '나'다.





결혼과 출산으로 날개 없는 작은 천사를 내게 데려다주고

이혼으로 내 인생의 예쁜 터닝 포인트를 선사해 내 삶에 날개를 달아준

전남편, 진심으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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