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긴 할까?
그때의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제 불가능이라고 본다.
슬프게도.
언젠가 본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에서
40년 만에 황혼 이혼을 하고
바다에서 소희네 횟집을 운영하다
팔순이 다 되어 그리스로 시집을 간다던 어떤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들 해
사랑보다 좋은 게 음써
밥 먹듯이 해 봤다고 휙 건너뛰지 말고
안 해봤다고 또 미련하게 가만히 있지 말고
그저 시치미 뚝 떼고
처음 해 보는 것처럼 이쁘게 해
붙어살건 갈라 살 건
물레방아를 돌리든 떡방아를 찧든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그지 새끼들이야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 이 말이야
알았나?
여기에 소희(내가 좋아하는 배우 이선빈)는 이런 내레이션을 한다.
예전에는 저 모래알처럼 지천에 널린 게 사랑이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사랑이 어려워진 게.
우리한테도 남은 사랑이 있기는 한 걸까ㅡ
내 맘이 딱 그 맘이다.
나 역시 위의 그리스로 시집가는 할머니의 말씀처럼, 사랑에, 연애에 아주 긍정적인 입장이다.
하나같이 그지 같아도,
그 사랑이라는 감정은,
나를 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다.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생기지 않을 것만 같다는 것이다.
20대의 나는 남자친구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달고 사는 여자였다.
'좋아하는 감정=사랑'이었다.
어떤 사람인지 겪어보지도 않고 순간의 '찌릿'하는 전기 통하는 감정을 '사랑'이라 불렀고,
그 '사랑' 하나로 결혼했다.
'사랑이었던' 감정 하나로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40대가 되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한번 다녀와서인지, 사람 보는 눈만 높아졌다.
'찌릿'하는 사랑은 다 소용없음을 알아서인지, '찌릿'이 모두 소진되어서인지, 아직 '찌릿'하는 사람을 못 만나서인지, 20대 때는 금사빠처럼 시도 때도 없이 '찌릿'하던 게 없다.
사람 보는 눈이 높아졌다는 건, 어떤 얘기냐면.
내면이 충만한 사람이 좋다.
자격지심은 지긋지긋하기 때문이다.
내면이 충만해서 자기 자신에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여유가 있다. 자격지심은 없다.
직장에 찌들어 있지 않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즐기는 사람이 좋다.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며 직장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언제든 그 직장을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은 왠지 원하지도 않는 나를 만나며 어디 가서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고, 언제든 나를 떠날 준비를 할 것만 같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일과 자신이 선택한 사람에게 즐겁게 최선을 다 하는 사람이 좋다.
독서와 음악과 사색을 즐기는 사람이 좋다.
내가 이것들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함께 듣고, 함께 생각하며 지내고 싶다.
각자의 삶의 영역을 지켜주는 사람이 좋다.
나는 내 삶의 반경이 크게 변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역도 지켜주고 싶다.
그러려면 역시 결이 비슷한 사람이면 좋겠다.
그런데 또 중요한 건,
내가 다시 결혼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미혼이든, 돌싱이든 그건 상관없는데, 비혼주의였으면 좋겠다.
그런데 말이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희망사항, 이상형? 이니까.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보자면.
내면이 중요하긴 하지만, 솔직히 내면만 100% 보는 건 아니니까.
외면을 본다고 내가 속물은 아니니까.
키는 컸으면 좋겠다.
선하게 생겼으면 좋겠다.
(내 나이쯤부터는 살아온 인생이나, 성품이 얼굴에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선하게 살고 선한 성품이면 좋겠다.)
경제적으로는.
대대로 부잣집 아드님은 부담스럽고(신데렐라 되기는 글렀다.), 자신의 능력으로 들어오는 수입이 나보다는 여유로웠으면 좋겠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남자가,
안 나타난다는 것이다.
더더군다나,
문제는,
이런,
남자가,
나를 만나겠냐고.
"그래. 겠냐고.ㅎㅎ"라고 웃어 본다.
20대, 조금만 좋아도 '사랑'이라고 믿었던 그때의 내게
지금의 나처럼 내면이든 외면이든 저런 '조건'따위는 없었다.
"이상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물음에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요."
20대,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몰랐고, 내가 어떤 사람과 만나고 싶은지도 몰랐다.
40대,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 줄 알고, 내가 어떤 사람과 만나고 싶은지도 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찌릿'함만이 사랑의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사랑의 무게와 책임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함부로 '사랑'이라는 단어를 입에, 마음에 올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의 아이를 '사랑'한다.
나의 엄마를 '사랑'한다.
나는 그 사랑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런 것만이 내게는 '사랑'이다.
그냥 좋아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20대, 나는 사랑의 무거움을 모른 채 사랑했다.
40대, 나는 사랑의 무거움을 알기에, 사랑이 두렵다.
하여, 나는 오늘도 소망한다.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좋은 '사람'을 만나 내가 다시 그 두려운 '사랑'을 할 수 있기를.
이 글의 서두에서 '그때의 그런 감정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그건 이제 불가능이라고 본다. 슬프게도.'라고 했다.
그 시절처럼 심장이 '찌릿'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내게 사랑이란 그런 사랑보다 '사람'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사랑'이 더 사랑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꾸어야 한다.
'슬프게도.'가 아니다.
'기쁘게도.'가 될 것이다.
그런 순서를, 변화를 나는 기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준비가 되어있는데,
도대체 고놈의 사랑이 언제 오냐고오오오오!!!!!!!!
아무튼, 나만의 돌싱은,
어른이 된 진짜 사랑을, 그래도, 한번 기다려보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