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기계치로, 해체는 했는데 다시 조립할 때 순서를 몰라 "여보!"하고 전남편을 부른 적이 허다했다.
(정말이지 이놈의 기계는, 나와는 영 맞지 않는다.)
무거운 것들을 들어 날라야 할 때 나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그 '여보'가 없다. (심지어 이제 그 '여보'는 다른 여자의 '여붕이'가 되었다.)
다른 힘 센 남자가 필요해졌다.
우리집에서 지금 나는 '기계 전문가'로 통한다.
기술 선생님으로 정퇴를 하신 친정아빠가 볼 때 정말 가소로울 노릇이겠지만.
(그러니 아빠, 빨리 기운 차려서 아빠가 다 고쳐주세요!)
아빠는 독한 항암약의 부작용으로 손발 저림이 심해져 손가락으로 물건을 잡으면 떨어뜨리기 일쑤이며, 겨우 숟가락, 젓가락을 들어 식사를 하시는 정도이다. 말 할 기운이 없어 '이걸 이렇게 해 봐.'라는 설명도 힘드신 상황이다. 뭐, 말씀하셔도 기계치인 내가 알아들을 리 없겠지만 말이다.
친정엄마는 기술 선생님인 친정아빠와 한평생 살며 모든 걸 다 아빠 손에 맡기셨다.
가스레인지 건전지를 교체하는 나를 보며 "너는 그런 것도 할 줄 안다~! 나는 한~~번도 해 본 적도 없는디."하셨다.
(엄마, 그건 자랑인가요?)
얼마 전에는 티비가 안 나온다며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티비를 못 보신 적이 있었다.
셋톱박스 코드를 뺐다가 다시 꼽으니 문제 해결!
"전문가가 오니까 문제 해결이구만!"
(엄마, 간단하잖아요!!!)
요즘 나는 이런 식의 '전문가'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작년 여름에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확인할 일이 있어 sd카드를 빼다가 그 카드가 블랙박스 안에 잘못 들어간 적이 있었다.
분해를 하다 블랙박스가 망가져 못 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섣불리 분해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집에 남동생과 올케가 놀러왔고, 남동생과 올케가 이리저리 블랙박스를 분해하여 돌리더니, 칩들 사이에서 sd카드를 빼내고 다시 조립하는 데 성공했다.
세상에, 둘의 그 모습이 요즘 말로 얼마나 캐미가 쩌는지 새삼 멋있게 느껴졌다.
근데 이제 내가 우리 집 '기계 전문가'라니, 1년 사이에 일취월장했다.
게다가 '가구 옮기기, 에어컨 해체하여 청소, 책 박스에 담아 옮기기' 이렇게 힘쓰는 일은 이제 이 집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다.
동글이가 어릴 때 읽던 책들을 정리해서 조카에게 주기 위해 박스에 담아 옮기거나 필요에 의해 가구를 옮긴 날에는 밤에 뜨거운 찜팩을 어깨나 허리에 대고 자도, 다음날 담이 오거나 허리가 끊어지게 아프기 일쑤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하루종일 아빠 병시중에 어깨가 남아날 날이 없는 엄마, 열 살 동글이에게 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여름이다.
날이 갈수록 더워지고 있다.
에어컨 청소를 해야 했다.
요즘 에어컨은 뭐 이리 복잡한지,
예전 모델은 바람 나오는 곳을 요리조리 드라이버로 돌려 분해하면 되어서 청소가 쉽던데,
요즘 에어컨은 분해조차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러다가 내 힘에 에어컨이 부서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에어컨 청소업체를 불렀는데,
에어컨 청소가 문제가 아니라 전원이 안 켜진단다.
분명 에어컨 청소를 위해 내가 요리조리 해봤을 때는 전원이 들어왔고, 팬 사이사이에 낀 먼지들이 보였는데 말이다. 게다가 우리 집 제품은 2 in1으로 지금 큰방에서는 벽걸이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는데.
AS를 맡겨 전원 포트를 먼저 수리했다.
이제 청소만 남은 상황.
청소업체 직원이 와서 에어컨 분해하는 것을 보기도 했고, as를 맡기며 보기도 해서, 어느 정도 순서와 요령을 익힌 나는 굳이 20만 원 정도를 들여 청소 업체를 불러야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청소업체가 와서 청소를 했는데도 곰팡이 냄새가 난다느니, 제대로 청소를 안 하고 간다느니 하는 후기들도 있어서 못 미더웠다.
게다가 에어컨 본사에서 청소업체 측과 계약이 끝나 우리집에 오신 분은 청소 업체가 아니라 본사 직원이었으며, 그래서 서투르고 청소 시간이 오래 걸릴지 모른다고 직원이 직접 설명을 하기도 했던 터였다.
그래! 해보자!
본 기억을 되살려 호기롭게 에어컨을 뜯는데!
아뿔싸!
에어컨이 아니라 내 손톱이 뜯겨 피가 났다.
아, 힘밖에 방법이 없는 것인가. 좌절했다.
그러다 우리집 에어컨과 같은 에어컨을 쓴다고 했던 E언니가 떠올랐고 E언니네 집에 가서 형부에게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이건 나 혼자서는 못하겠다 싶었다.
형부는 절대 혼자 못한다고, 쉬는 토요일에 오셔서 해주시겠다 하셨다.
그래도, 그럴 수는 없었다. 형부도 2시간 넘게 걸리신 보통 일이 아닌데, 에어컨 일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공학도의 마음으로, 이웃의 마음으로 해주시러 오시겠다는 그 마음만 감사히 받고 그날 집에 돌아오자마자 에어컨 분해를 시작했다.
형부가 말했던 선을 다 뽑아 핀을 청소하는 데 까지는 안 가더라도 앞판을 뜯어 내서 보이는 먼지라도 닦아내야 했다. as하러 온 직원도 이 정도면 청소까지는 필요 없을 거라고 했으니까.(재작년에 구입한 에어컨임.)
E언니가 보내준 유튜브 영상을 찬찬히 보며 그대로 따라 했다. 힘이 좀 들고 땀이 뻘뻘 나긴 했지만, 앞판을 뜯어내는 데 성공! 했다.
팬 사이사이에 낀 먼지들을 닦아내고 E언니와 K언니가 함께 있는 톡방에 사진을 보냈다.
언니들은 엄지 척 이모티콘을 날려주었다.
참, 이게 뭐라고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청소를 끝낸 뒤 옆에서 티브이를 보던 동글이에게 자랑스레 얘기했다.
"동글아, 이거 다른 집은 아빠들이 다 했다는데, 우리집은 엄마가 해냈어!! 여자도 할 수 있지?"
"응! 엄마 쫌 멋있었어!"
내친김에 자동차 에어컨 필터도 교체해 보기로 했다.
보통 엔진오일 교체할 때 해달라고 한다는데,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그리 어렵지 않게 교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전남편이 매해 여름 에어컨 냄새 제거 훈증캔으로 냄새 제거를 하던 게 생각나서 그걸로 해봤는데도 없어지지 않는 에어컨 곰팡이 냄새가 자꾸 거슬리던 참이었다.
차종에 맞는 새 필터를 쿠팡으로 구입하고 인터넷에서 본 대로 조수석 글로브박스를 열고 에어컨 필터가 들어있는 카트리지를 열어젖힌 후 필터를 새 걸로 갈아 끼우기만 하면 끄읕!
물론 말처럼 쉬운 작업은 아니었고, 에어컨 필터 카트리지를 여는 데에서 좀 헤매긴 했지만(좀 많이 헤매다 역시 마이너스의 손! 부품을 부수긴 했지만 ㅎㅎ ), 나름 간단하게 필터를 교체할 수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손쉬운 작업을 여태껏 미룬 채 곰팡이 냄새를 없애겠다고 훈증캔도 해보고, 곰팡내보다 더 센 차량용 방향제도 놓다가 차에 탄 엄마를 어지럽게 만들었다니.
역시 사람은 배워야 하고, 못한다고 움츠러들어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이것저것 도전해봐야 한다.
이 어려운 것들을 해 낸 내가 정말 대견할 정도였다.
요즘 집 안팎으로 상쾌한 에어컨 쐬며 다니니, 살 것 같다.
집 에어컨 청소와 차량 에어컨 필터 교체로 난 원더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우리집 '기계 전문가'로 통할 것이다.
매해 여름 에어컨 청소 담당일 것이고, 차량용 에어컨 필터도 이제 매해 교체해서 사용할 것이다.
무거운 짐을 옮기는 일들은 여전히 힘들고 허리가 끊어지겠지만, 핸드카트 등의 도움을 조금 빌리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