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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다른 여자 셋의 첫 경험

아슬아슬 첫 여행기

by 문득 달

*매거진에 발행했던 글을 일부 수정하여 연재북에 재발행합니다.*


방학을 맞이했다.

내가 교사라는 직업을 갖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여럿 중 하나는 아이와 방학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7kg이 넘는 댕댕이를 키우는 덕(?)에,

(7kg이 넘는 반려견은 항공사에 따라 다르지만 대부분의 해외는 기내에 못 들어가고, 화물칸에 실려(?) 가야 한다고 해요.)

댕댕이를 누구에게 맡기고 여행 가는 건 싫다는 초딩이 덕(?)에,

비행기 타는 헤외여행은 꿈도 못 꾸는 우리 가족은,

국내로 눈길을 돌렸다.


성(氏)이 다른 여자 셋이, 성(性)이 다른 댕댕이와 함께 첫 여행을 떠났다.

가까운 곳에 당일치기는 다녀왔어도 1박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두근두근!



가평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미세먼지로 뿌연 서울 하늘이 북쪽으로 향하며 맑아지는가 싶더니, 눈발이 휘날렸다.

2시간 만에 남이섬 선착장에 도착했을 때는,

"우와! 여긴, 어제부터 눈이 왔나 봐!" 하며 초딩이 J가 신나 할 만큼 눈이 쌓여있었다.


나미나라공화국.

여긴, 초딩이를 낳기 전, 친정식구들과 전남편과 와서 닭갈비를 먹고, 사진을 찍었던 그곳이었다.

여기를, 초딩이를 낳고, 10년 만에 아빠도 없이, 전남편도 없이,

성이 다른 여자 셋이 왔다.

개모차를 끌고.


아무렴 어때.

비행기도 못 타 본 우리 딸, 배라도 타서 '출, 입국'해 봐야지.

겨우 10분짜리 운항이고, 여권 없이 통과하는 '나미나라공화국' 입국이지만. ^^


남이섬 안은 눈의 나라였다.

언제부터 눈이 왔는지 온 세상이 눈으로 가득 덮여 있었다.

뽀득뽀득 신발에 밟히는 눈소리가 좋은지 초딩이 J는 연신 입가에 웃음을 띠며 걸었다.

신난 건 초딩이 J 뿐만은 아니었다.

개모차에서 내려주니 댕댕이 K는 질주 본능을 일으키며 여기저기 영역표시를 하고 다녔다.

초딩이 보랴, 댕댕이 보랴 바쁜 우리 엄마 P여사도 오랜만에 오는 여행에, 눈이 온 남이섬의 풍경에 빠져들어 있었다.


남이섬 잣 파스타를 먹는데 이모에게 전화가 왔다.

이모와 통화를 하며 "야~ 눈이 안 왔으면 지루할 뻔했다야~~ 눈이 와서 운치도 있고 좋아~" 하는데,

'눈'에게 감사했다.

사실 P여사를 만족시키는 여행은 쉽지 않다.

P여사는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패키지여행에 익숙하고,

하루에 1만 5 천보는 기본으로 걸어 손목닥터 9988로 매일 200P씩 적립하는 강철체력이며,

국내는 물론 해외도 여기저기 안 다녀본 곳이 없는

여행 마니아이다.

물론, 이번 여행도 역시 P여사를 만족시키지는 못했다.

여유 있는 여행을 좋아하는 내 생에 가능할 일일지 싶다.


남이섬 곳곳 포토스폿이 있었고,

또 곳곳에 모닥불이 있었다.

모닥불에서는 마시멜로, 쫀드기 등을 구워 먹을 수 있도록 해 놓았고,

우리는 뜨거운 어묵을 호로록 먹으며 쫀드기를 구워주는 P여사의 사진을 찍었다.

머리가 하얀 P여사.

그새 주름이 자글자글해진 P여사.

불똥이 튀어 패딩에 구멍이 날까 하면서도 손녀를 위해 쫀드기를 구워주는 P여사.


남이섬을 한 바퀴 돌자, 초딩이 J는 다리가 아프다며 이제 그만 펜션으로 가자고 했다.

댕댕이 K는 개모차 신세가 된 지 한참이었다.

아, 아직 8천 걸음도 안 걸었는데.

P여사는 아쉬워했다.

가는 길에 어디 들를 데가 또 없는지, P여사는 궁금해했지만, 지친 초딩이 J를 데리고 갈 수는 없었다.

내일을 기약하고,

남이섬을 나와 펜션으로 향했다.


애견 동반이 가능한 작고 예쁜 펜션이었다.

아직 크리스마스 장식을 떼어내지 않아 눈 쌓인 바깥 풍경과 찰떡인 곳이었다.

주차장은 따로 있었는데, 오늘 손님이 우리밖에 없어서 객실 앞에 주차를 해도 된다고 했다.

주차장에서 객실까지 오르막길을 올라가야 해서, 편한 이동을 위해 객실 앞을 선택했다.

오르막길을 올라 눈길에 주차하는 데 애를 먹었다.

기어를 M에 놓아도 차가 움직이지 않았다.


싱글맘 S : 엄마, 여기 어떻게 가지?

P 여사 : 엄마도 몰라~ 여기 말고 아까 거기 주차장으로 그냥 가자~

싱글맘 S : 에잇, 몰라! 한번 가 보자!!!! 부아아앙!!


나의 사랑스런 초딩이는 그 순간,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엄마, 할머니, 댕댕이, 사랑해! 할아버지, 곧 만나!' 했다고 한다.

정말이지, 열한 살의 귀여움은, 끝이 없다. :D


급 올케와 조카도 오게 되어 마지막 순간이고 뭐고, 초딩이 J는 무척 신이 나 있었다.

7살이나 어린 사촌 동생과 노는 것이 세상 제일 힘들면서도, 세상 제일 신나는 초딩이 J.

매일 보고 싶어 하다가도, 하루종일 놀아주면 떼쓰는 어린 동생에게 지쳐버리는 초딩이 J.

삼촌, 숙모, 가끔 보는 이모들(나의 사촌동생들)의 사랑을 따뜻하게 느낄 줄 아는 초딩이 J.

동글동글 내 사랑 초딩이 J.


여자 셋이 출발해서 여자 다섯이 되었다.

정말 여자들만의 여행이었다.

댕댕이 K는 자신만이 유일한 남자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래도 지켜줄 양으로 현관문 앞에 자리 잡고 누웠다.


토치로 숯불을 피워 부채로 바람을 일으켜 불길을 세게 만들고

고기를 구웠다.

P여사가 없었다면 못했을 일이다.

물론, P여사가 없었더라도 어찌어찌 딸 먹여야 되니 "으악!"하고 했겠지만 말이다.

P여사는 "엄마 없으면 너네 어떻게 할래!" 했다.

그러게, P여사, 그러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


소고기를 구워 입에 넣으니 고기가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어른은 와인 한잔, 어린이는 보리차로 짠! 하니 추웠던 몸이 사르르 녹았다.


펜션 침대에 초딩이 J와 함께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들었다.


이렇게 예쁜 펜션에,

이렇게 예쁜 사람들과,

이렇게 예쁜 댕댕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래도록 이렇게 예쁘게 살 것이다.


그 사실이, 나를, 설레게 하였다.




우리의 첫 여행이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다음날 일정을 정하면서도 P여사는 더 보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고,

초딩이 J는 떼쓰는 사촌 동생을 이해할 수 없어했고,

싱글맘 S는 막국수 집으로 가는 길을 잘못 들어 고속도로를 타기도 했다. (설악산까지 가는 줄)

얌전한 것은 댕댕이 K 뿐이었지만, 또 모를 일이다.

댕댕이 K 역시 뭔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가령, 사람들만 고기를 먹고, 자기한테는 사료만 준다든지 하는.


그러나,

이게 시작이며,

우리의 모든 여행은 순조롭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행복이며,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성이 다른 만큼, 많은 것들이 다른 여자 셋이 살고 있다.

오늘도, 우리 셋은 우당탕탕이다.

매거진에 발행 당시, 댓글과 좋아요를 잊지 않기 위해 보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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