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다른 여자 셋의 한부모 가정
한부모 가정이라는 게.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던 예전에는 그 단어에 안쓰러움이 컸다.
보통 내가 그 단어를 접하게 되는 것은 학생들의 가정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상황이었으므로.
"아고, 어쩌다. 어른들 일에.. 애가 무슨 죄예요."
"그게, 집에서 살펴주는 사람이 없어서, 밖으로 나도는 게 아닌가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안쓰러운 시선에 초딩이 J를 두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전남편의 바람도 눈감았고, 흠잡히지 않기 위해 시댁에 열심히 했고, 내 취향이 아닌데 맞춰줬다.
막상 내가 한부모 가정에 놓이게 되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만,
솔직히, 그 단어가 별 게 아닌 게 되었다.
그냥, 이것도 살아가는 모습인 거지,
그게 뭐 안쓰러운 일이라고.
그러고 나니, 한부모 가정 아이들도 그저 다른 아이들과 같아 보였다.
모두, 그럴 수 있는 아이들일 뿐이었다.
또 한 가지 알게 된 것은 '한부모'라고 해서 다 '한부모 가정'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도 이제 한부모 가정이 되었으니,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게 뭐가 있는지 알아봐야지!
하고 인터넷 포털을 뒤져보는데, 내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이 없었다.
나는 한부모 가정을 이루고 살지만,
'법정 한부모 가정'은 아니었다.
또 따로 기준이 있었다.
소득 수준을 따졌다.
소득은 있으나 빚이 있는 것은 따지지 않았다.
우리 집보다 더 힘든 한부모 가정도 많을 테니, 어쩔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만.
이러면 복지의 사각지대에 있는 가정들도 있을 것 같다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있는 재산들을 다 어딘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빼돌려, 사회취약계층으로 등록되어, 임대 아파트에 살지만, 외제차를 끌고 명품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정말 힘든 데 소득 수준이 애매하게 낮아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도 있을 테고,
나처럼 소득과 빚을 감안해주지 않는 한부모 가정의 가장도 있을 테다.
그렇게 따지고 따져, 나는 '법정 한부모 가정'에 들지 못하는 '그냥 한부모 가정'이 되었다.
그런데 웃긴 건, 뭔가 기대했던 내 심리였다.
양육비도 못 받고 있으니, 정부에서 나를 가엾게 여겨 줄 것이라 생각했을까?
법적으로 양육비를 받을 수 있게 제도화해 두었는데,
그것도 적극 활용하지 못하면서, 아니, 그럴 용기도 없으면서,
'법정 한부모 가정'을 노리다니.
양심도 없다.
뭐, 양심도 없고, 용기도 없는,
나는 그러니까 진짜, 그냥 그런 평범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한부모 가정은, 그냥 그런 평범한 모습인 것이다.
이런 평범한 모습의 한부모 가정이기에,
내 딸 초딩이 J 역시 나름의 적응을 해 나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초딩이 J가 아빠를 보지 못했을 때는 아빠가 그리워 울었고, 더 이상 우리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슬픔에 통곡했다.
아빠를 6개월 만에 봤을 때는 다시 아빠를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함에 울었고, 아빠와 함께 하는 그 자리에 엄마가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에 통곡했다.
한두 달에 한 번 아빠를 정기적으로 보게 되자, 조금씩 안정이 되었고,
지금은 아빠가 그리운 마음보다는 할아버지가 그리운 마음이 더 커져버린 초딩이 J이다.
전화를 걸면 자주 받지 않고, 나중에 문자를 보내는 아빠이지만,
그래도 더 이상 전화를 받지 못하는 할아버지보다는 덜 그리운 것일까.
최근 깜빡이는 눈을 보며 그 깜빡이는 두 눈이 내 탓인 것만 같아, 한없이 미안하고 안쓰럽다가도,
내가 초딩이 J를 그렇게 보는 순간, 그 마음을 알아챌 것만 같아,
안쓰러운 마음을 거두고,
우리는 작은 행복들로 감사한 하루를 살아가고 있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이 시간들이 우리가 한부모 가정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다.
실제로 우리 모녀는 전남편이 있을 때보다 더 가까워졌고, 더 친구 같아졌고, 더 서로를 애틋해하며,
서로를 꽉 끌어안는다.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 한부모 가정은,
초딩이 J에게 그런대로 적응할 만한 한부모 가정은,
그러나,
P여사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가 없나 보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는 서울에 있을 테니, P여사 할 일도 많고, 친구들도 많은 광주에서 사는 것이 어떠냐 제안했을 때,
P여사는 단칼에 거절했다.
나와 초딩이 J가 동동거리며 살 것이 안쓰러워 그 꼴을 못 보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혼한 딸이 동네 창피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광주는 좁은 동네라, 한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인데 거기다가 내가 이혼했다고 말하는 것이.. 창피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서울 동네에서도 딸이 이혼한 것은 창피한 모양이다.
어차피 다 모르는 사람들인데, 남이 뭐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랬지만,
P여사는 남들 다 하는 사위 자랑 못하는 것이 그렇게도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가 보다.
아빠와 함께 맨발 걷기를 하시던 분들에게도 나의 이혼은 비밀이다.
아빠의 소풍 소식이야, 다들 그러려니 하겠지만,
딸의 이혼 소식은 알리기 창피했나 보다.
구태여 알릴 필요는 없었지만, 누군가 물었을 때 말하기 곤란했나 보다.
누군가 사위 자랑을 시작하면 P여사는 얼른 자리를 피한다고 한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딸도 보이고, 손녀도 보이고, 강아지도 보이는데, 사위가 안 보이잖아."
"엄마, 아~~무도 신경 안 써. 그런 것에 요즘 아무도 관심 없어. 그런 호구 조사 아무도 안 한다니까!"
"아니야~ 내 나잇대 사람들은 다 물어보고, 신경 쓰고 그래."
"아니, 엄마, 그래, 신경 좀 써서 이상하게 생각하면 뭐 어때. 그냥 그런가 보다 해~ 뭐 남들 시선에 그렇게 신경 쓰고 다녀~"
"그러게~근데 그게 잘 안돼~"
"그럼 엄마, 어디서, 사위 하나 데려와?"
그건 또 싫단다.
그런데, 아직 젊은 내가 외로이 사는 건 또 싫단다.
그런데, 나이 마흔 넘은 내가 밤에 친구 좀 만나고 돌아다니면, 선생님인데, 동네 사람들 보니까 조심하란다.
엄마, 선생님은 밤에 친구 좀 만나면 안 돼?
엄마, 선생님은 이혼 좀 하면 안 돼?
엄마, 나는, 남편이 없어도 괜찮아.
엄마는, 사위 없는 게 그렇게 창피해?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생각했다.
양금명이 오애순에게 메달이었듯,
나는 우리 엄마에게 자랑이고 메달이었다.
공부하고 싶었는데, 큰 외삼촌 대학 보내야 해서, 온 집안 식구들 밥을 차리느라, 대학 못 간
우리 엄마에게 나는,
초등학교 때 올백 맞아 학교 선생님들께 족발을 돌렸을 때도, (왜 족발인지 모르겠다.)
중학교 때 그래도 전교 3등 안에 꾸준히 있었을 때도,
고등학교 때 수능은 망했지만 국립대 장학금 받고 다닐 때도,
오래 공부했지만, 교사 임용에 합격했을 때도,
노처녀가 될 때까지 결혼을 안 한다고 다른 집은 난리인데, 스물아홉 적절한 나이에 웨딩드레스를 입었을 때도,
젊은 애들이 애를 안 낳아 큰일이라는데, 서른 하나 적절한 나이에 꼬물꼬물 귀염둥이를 낳았을 때도,
우리 엄마에게 나는 금메달까지는 아니어도, 은메달 정도는 되는 딸이었다.
그런데, 그 은메달 딸이 꼬꾸라졌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100m 달리기 도중에 돌에 걸려 자빠졌다.(고 엄마는 생각한다.)
엄마, 엄마 딸 인생은 지금이 봄날인데,
엄마 딸 인생은 42.195km 마라톤이라서 이제 겨우 10km쯤 온 것 같은데, (아니, 그럼 나는 160살까지 살 예정인 것일까? 체감 10km라는 것이다. 마음은 늘 이팔청춘!)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