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 다른 여자 셋의 패션 전쟁
우리 집은 아침마다 전쟁이다.
얇게 입고 가고 싶은 초딩이 J와 따뜻하게 입히고 싶은 P여사, 싱글맘 S의 전쟁이 시작된다.
주로 어른들의 승리로 끝나는 전쟁이지만, 초딩이 J는 근성 있게 매일매일 포기하지 않는다.
맘에 든다.
초딩이 J는 어릴 때부터 패션에 대한 고집이 센 편이었다.
하늘하늘 레이스가 달린 공주 드레스를 좋아하던 핑크공주 꼬꼬맹이 시절,
어린이집에 백설공주, 신데렐라, 엘사 드레스를 입고 가려고 울고불고 난리통이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하츄핑인가요? 공주 드레스 때문에 실랑이중이신 이 땅의 공주님들의 어머님들! 파이팅입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는 졌다.
꼬꼬맹이었던 J도 울고, 나도 울었다.
그래서 내가 강구한 방법은, 드레스를 입히고 바지는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 보내는 것이었다.
엄마 말은 안 들어도 선생님 말은 잘 듣는 요~상한 심보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린이집 안 가는 주말에도 드레스 사랑은 여전했다.
매일매일이 드레스 파티였다.
긴 드레스가 아니라면, 레이스 달린 치마라도 입어야 했다.
심지어 한복도 좋아해서, 한복을 입고 씽씽이를 타고 달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7살이 되어 점점 청바지, 트레이닝바지 등 편한 옷을 선호하더니
지금은 드레스는커녕 예쁜 원피스를 제발 한 번 입어주라고 사정사정해도 안 입는 초딩이가 되었다.
(그러니, 공주 드레스로 실랑이 중이신 어머님들! 입고 싶어 할 때 마음껏 입히세요! 입으라고 입으라고 해도 안 입는 날이 옵니다.)
패션 스타일도 확고해서 의견을 묻지 않고, 그냥 내 눈에 예뻐 보여서 사 온 옷들은
본인 취향이 아니면 거들떠도 안 보아, 한 번도 안 입고 넘어간 옷들이 생겼다.
아깝고 아쉬웠다.
그리하여, 내가 강구한 방법은, 컨펌받기이다.
쇼핑은 무조건 같이 하거나, 인터넷 쇼핑으로 먼저 스타일 확인을 받는다.
어쩌다 혼자 옷을 사러 갈 일이 있으면 영상통화를 걸어 확인한다.
이 방법은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 주어 나의 가계 경제에 도움을 준다.
초딩이 J는 효녀다.
게다가 초딩이 J는 취향이 확고해, 쇼핑 시간마저 줄여준다.
초딩이 J는 한 번 꽂힌 옷, 그걸 사면 끝이다.
그다음은 그 어떤 옷을 들이밀어도 안 본다.
확고하게 마음을 굳히면 그걸로 끝인,
초딩이 J는 뒤끝 없이 확실한 여자다.
게다가 초딩이 J는 초1부터 본인이 코디하여 입고 다녀 엄마의 출근에 도움을 주었다.
이상한 조합으로 코디해도 그냥 입고 가라고 했다.
그게 본인 스타일이며, 어차피 아무리 내 스타일대로 우겨봐야 내가 질 게 뻔하기 때문이다.
너무 덥거나, 너무 춥지만 않게 적절히 외투를 골라 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외투에서 벌어졌다.
언젠가부터 롱패딩 유행이 끝나고 바야흐로 숏패딩의 시대가 왔다.
추우니까 엉덩이를 가리는 롱패딩을 입으면 좋으련만,
다른 애들은 다 숏패딩을 입는다며 하나 사달래서 사줬더니,
계속 그 새까만 숏패딩만 입으려 했다.
그마저도 마음에 들어 한 숏패딩이 구스다운이 아닌 폴리 패딩이라 한겨울에는 추운 소재였다.
구스다운인 보라색 롱패딩을 입었으면 하는데 자꾸만 새까만 숏패딩을 입으려 하니,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전쟁은 다음 겨울에 구스다운 소재인 숏패딩을 사 주면 끝날 일일까?
그렇다면, 이 엄마가 아주 좋은 구스다운 숏패딩.. 까짓 거 사 줄 수 있는데.
그렇다면, 이 전쟁은 왜 겨울이 아닌 봄에도 계속되고 있는가?
문제는 친구들이다.
주변 친구들 몇몇이 옷을 얇게 입고 다닌다.
날이 더웠다 추웠다 하니,
기온은 겨우 15도를 웃도는데 옷은 반팔에 얇은 여름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다니는 친구들이 몇 생겼다.
그러니, 우리 집 초딩이도 반팔을 입고 싶어 한다.
그러면, 그냥 입고 싶은 대로 입히면 될 일인데, 나는 감기 걸릴까 봐 걱정이다.
그냥 콧물 찔찔 나는 감기라면, 어린이들 다들 그러고 다니니 괜찮은데,
열이 날까 걱정이다.
초딩이 J는 애기 때나 걸리는 가와사키를 초2 끝무렵에 앓았다.
고열이 5일이 넘게 떨어지지 않아 축 처진 아이를 보듬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나날들이 떠올라,
또 그렇게 될까 봐 무섭다.
그래서 너무 얇게 입히지는 또 못하겠다.
이제 초딩이 J가 입고 싶어 하는 반팔을 마음껏 입어도 되는 여름이 왔다.
요즘 초딩이들 사이에서는 레이어드 크롭티가 유행이다.
나도 입고 싶지만 뱃살 때문에 못 입는 크롭티를 초딩이 J가 대신 예쁘게 입어주니
대리만족이 된다.
P여사는 이런 초딩이 J가 고집이 세다고 하지만,
나는 이런 고집이 맘에 든다.
내 취향이 없어 P여사가 사 준 옷들을 군소리 없이 그대로 입고 자랐던
나와는 달라 맘에 든다.
아침 출근길에 옷을 입으면서도 P여사 눈치를 힐끗 보는
나와는 달라 맘에 든다.
그런데 우리 집 P여사는 백화점에서 근무했던 멋쟁이 할머니이다.
P여사는 키도 크고 다리도 길고 그래서 뭘 입어도 요즘 말로 '간지가 난다.'
백화점에서 어깨너머로 본 옷들이 많아 패션 센스도 남다르다.
남들 그냥 두르는 스카프도 우아하게 잘 두른다.
P여사가 사 온 옷들은 모두 '간지 난다.'
내가 P여사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P여사의 이런 센스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전남편의 눈치를 보며 옷을 입었던 쭈글이 때와는 차원이 다르다.
P여사의 눈치를 보며 옷을 입는 요즘 나는 우리 학교 '패셔니스타'로 통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내 눈치도 맘에 든다.
초딩이 J는 발 사이즈가 나와 같아져 내 운동화 몇 개를 같이 신게 되었다.
내가 날씬이 시절에 입었던 예쁜 옷들이 초딩이 J에게 박시하게 맞아 '오버핏'이라며 좋아한다.
나는 기꺼이 내 옷장과 신발장을 초딩이 J에게 내어준다.
싱글맘 S는 P여사가 백화점에서 샀던 멋진 옷들을 탐낸다.
P여사는 기꺼이 옷장을 내어준다.
우리의 전쟁은 서로의 옷장을 내어주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 자매처럼 서로의 옷장을 탐하며 티격태격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