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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양관식

성이 다른 여자 셋의 사랑

by 문득 달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 유치환 <깃발> 중 -


'폭싹 속았수다'에서 양관식이 오애순을 향해 목 놓아라 외쳐

'노스탤지어'가 뭔지도 모르면서 우리집 초딩이 J도 외우게 된 유치환의 <깃발>이다.


정작 목놓아라 외친 양관식은 '노스탤지어'가 뭔지 알았을까.

문학 소녀 오애순에게 '노스탤지어'는 무엇이었을까.

많고 많은 시 중에서 왜 하필 도달하지도 못할 '푸른 해원(海原)'을 향해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을 흔드는 <깃발>이었을까.

'노스탤지어'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목놓아라 그것을 부르짖는 양관식의 '순정', '사랑'은 대관절 무엇이었을까.


오늘은 성이 다른 여자 셋의 '양관식'에 대해 얘기해 보려 한다.


박보검.

양관식.

은 우리집에서 '세상 제일 멋진 남자'로 통한다.


P여사는 평생 양관식같은 남자와 살았다.

우리 아빠는 '양관식 그 잡채'였다.


연애 시절부터 두 눈을 감던 그 순간까지 아빠에게는 오로지 'P여사' 하나뿐이었고,

아빠에게 나는 '양금명'이었다.


우리 집은 속된 말로 P여사의 끗발이 제일 센 집이었다.

아빠가 NO해도 P여사가 OK면 OK가 되는 셈이다.

그런데 아빠는 한 번도 NO 한 적이 없다.

그냥 아빠는 뭐든지 다 P여사에게 맡기고, P여사가 하자는 대로 했다.

아빠는 P여사가 해 주는 음식이라면 다 좋아했고,

P여사가 사 주는 옷이라면 다 좋아했고,

P여사가 가자는 곳이라면 다 가주었고,

P여사가 하자는 것은 다 해 주었다.

주말에도 따로 친구를 만나러 나간 적이 없었고, 오로지 가족과 시간을 보내 주었다.

혼자만의 취미 생활이라면 '기타 치기' 하나뿐이었다.

아빠에게는 P여사가 온 세상이었고, 온 우주였다.


아빠는 소문난 애처가였다.

가끔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티브이를 보시거나,

주말마다 편백나무 가득한 산에 컵라면 싸들고 가서 데이트를 즐기시는 모습은 딸인 내가 봐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래서 온 동네 아줌마들, P여사의 네 자매들은 P여사를 부러워했다.


그런데 정작, P여사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가끔은 답답해했고, 가끔은 피곤해했다.

남자가 한 번쯤은 "이렇게 하자!"는 맛이 있어야지, 맨~~날 P여사만 바라보고 있다고, 귀찮아했다.

아빠처럼 '착하디 착한 남자'가 세상 제일이라고 해 놓고,

양관식처럼 '오애순만 바라보는 착한 남자'가 세상 제일이라고 해 놓고,

아빠처럼 양관식처럼 '착하기만 하면', '가난하면' 여자가 평생 고생한다고 한다.


그런 P여사는 아빠가 현생에서 사라지니, 갑자기 집안일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졌다.

평생 P여사의 양관식이 핸드폰 어플 관리며, 집안 전기 수도 등의 잡다한 수리 등을 비롯하여 퇴근 픽업에 주말여행을 책임졌기 덕분(?)이었다.

천년만년 같이 살 줄 알았다고 했다.


양관식이 떠난 후로, 우리 P여사는 홀로서기를 준비 중이다.


싱글맘 S는 양관식이 아니라 그냥 박보검이 좋다.

평생 나만 바라보고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노스탤지어'를 외칠 수 있는 사랑도 좋지만,

그건 그냥 박보검이라서 좋은 것이다.

현실에 닳고 닳아 찌든 싱글맘 S에게는 대학도, 육지도, 시인도 못 이뤄줄 사랑은 고달프기만 하다.

자본주의의 노예라서가 아니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 버티느라 '무쇠'는 녹슨다.

혼자 끙끙 앓느라 병이 생긴다.

양관식도, 우리 아빠도 녹이 슬었다.

녹이 스는 무쇠를 보고 있는 사랑은 고달프다.

조금 더 여유가 있었다면, 어쩌면, 녹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평생 나만 예뻐해 주고,

나를 위해서라면 '노스탤지어'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겸비한,

여유가 있어서 대학도, 육지도, 시인도 이뤄줄 수 있는 그런 양관식이 세상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런 양관식이, 뿅! 하고 나타날 리 없다는 것을, 싱글맘 S는 알고 있다.


초딩이 J는 박보검은 아니지만 양관식을 만났다.


'폴 블랑코-다가갈게요' 노래에는 '항상 있는 듯 없는 듯 그대의 배경이 되어 나 그대를 지켜줄게요.'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노래를 한 때 엄청 좋아해서 초딩이 J와 항상 들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노래 가사를 들으며 초딩이 J에게 이런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했었다.

내 곁에서 항상 나를 지켜주는 남자.

바로 양관식 같은 남자였다.


그리고 드디어 초딩이 J에게 그런 남자가 나타났다.

초딩이 J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반장으로, 초딩이 J를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을 혼내 준다고 한다.

소문으로는 그 남자아이도 초딩이 J를 좋아한다고 하여,

최근 고백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는 초딩이 J이다.


요즘 애들은 정말 빠르다.

나는 초4 때 그런 감정을 느꼈을까?

초4에게 좋아한다는 건 어떤 감정일까.

그 남자아이를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한다.

"엄마, 이런 게 바로 사랑인가 봐." 라며 수줍게 말하는 초딩이 J가 마냥 귀엽기만 하다.


나는, 초딩이 J의 눈을 믿는다.

그런데 꼭 얘기해주고 싶은 것이 있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 사람을 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나는 몰랐고, 오애순은 알았다.

양관식과 사랑에 빠지기 전에 양관식이라는 사람을 알았다.

자신을 위해 조구새끼를 가져다주고, 늘 곁에서 '있는 듯 없는 듯 배경이 되어 지켜주는' 양관식의 사람 됨됨이를.

그래서 선택했다.

육지도, 대학도, 시인도 못 이뤄줄 섬 놈을.


그러니까, '사랑'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런데, 기왕이면

초딩이 J가 별도 달도 다 따 줄 여유도 있어

내 딸을 잘 지켜 줄 수 있는

정신이 건강한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여자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

또, 엄마의 바람이기는 하다.


역시, 엄마 눈에는, 내 딸은 다 아까운 법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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