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인공지능의 단초
은산으로 내려가는 내내 뿌옇게 안개가 낀 듯한 그러나 뭔가 그 안개 속에서 도깨비불처럼 머릿속을 휘젓고 지나다니는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박율은 온수현(溫水縣: 지금의 아산시) 온천 옆 가마골(加麽谷)을 지나치던 중 덜크덩 덜크덩 찍어대는 물레방아를 구경하다가 말이 끄는 기리고차(記里鼓車)에 치일 뻔한다. 그 수레는 1리(里)를 갈 때마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북을 쳐서 거리를 알리게 만든 자동 거리 측정용 수레였다. 나무로 만든 인형이 둥둥둥 북을 칠 때마다 박율의 머릿속은 뿌옇던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박율은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 최석정에게 선물 받은 서책을 펼쳐 자격루의 설계도면을 훑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덜크덩~ 덜크덩~ 또르르 둥!둥!둥! 덜크덩~ 덜크덩~ 또르르 둥!둥!둥! 구성지고 리드미컬하게 주변의 소리가 어우러진 가락이 만들어지면서 박율은 닫혔던 구름이 걷히고 천지가 열리며 하늘의 한 줄기 빛이 넘실거리는 듯한 신비로운 환각을 체험한다.
중이 염불을 외듯 한참 동안 실성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박율은 점점 공자의 사당에서부터 줄곧 자신을 괴롭히던 어렴풋한 영감의 가닥이 잡혀 나가기 시작했다.
사당 홍살문에 붙어 있던 엿가락 부적과 자격루(自擊漏)의 정교한 도르래 장치들과 쇠구슬로 움직이던 자동 시보 목각 인형과 기리고차(記里鼓車)의 정밀하고 교묘하게 맞물리면서 돌아가던 톱니바퀴가 구동하는 북 치는 자동인형이 모두 한데 어우러져 아귀가 딱딱 맞아떨어지는 톱니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박율의 천재적인 발상을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따라잡기엔 많은 무리수가 따르나 최대한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의식의 흐름에 따라서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부적(符籍)은 종이에 글씨, 그림, 기호 등을 그린 것으로 액막이나 악귀, 잡신(雜神)을 쫓거나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 주술적 도구다. 부적(符籍)에 그려진 글씨, 그림, 기호 중 인간에 가깝게 구현할 부적의 문양과 명명학적 주문의 연결 고리를 찾는다면, 자격루(自擊漏)와 기리고차(記里鼓車)의 북 치는 목각 인형처럼 사람을 똑 닮은 자동 인간을 만들 수 있는 주문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러한 자동 인간의 발명이 가능하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인공지능(人工智能)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부적의 기호 대신 0과 1의 괘로만 이루어진 숫자로 인공지능(人工智能)을 만들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제야 정승 최석정이 얘기했던 '그 단초를 장영실의 자격루에서 발견했다.'라는 말의 진의를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던 박율은 온몸을 관통하는 전율에 몸서리치며 탁! 하고 자신의 양 무릎을 쳐 댔다.
박율은 최석정의 기묘했던 바둑 37수를 복기하듯 그다음에 이어졌던 말을 떠올렸다. "숫자를 더하고 뺄 수 있는 주판이 무한하게 늘어서서 단계별로 내용을 읽고 쓸 수 있는 자동화된 기계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