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
"겨우 다 끝냈네. 좀 쉴까?"
성희는 화면을 응시하며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력서의 '제출' 버튼을 누르면서 그녀는 작은 희망을 품었다. 이번엔 꼭 될 거야. 하지만 희망은 금세 불안과 무력감에 자리를 내주곤 했다.
스물여덟 살의 성희는 여전히 취업 준비생이었다.
세 번의 인턴 생활을 마치고도 정규직 문턱을 넘지 못한 그녀는 더 이상 ‘꿈의 직장’이 아닌
단지 ‘어디든’ 들어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이제 단순했다. 부모님에게서 벗어나 독립된 삶을 사는 것.
그러나 그녀의 마음 한편에는 부모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초등학생이었던 시절, 성희는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은 여자아이였다.
성적은 반에서 중위권이었지만 음악에 모든 열정을 쏟았던 성희에게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부모님에게 성적표가 더 중요했다. 그녀의 10살 때의 기억이 아프게 떠올랐다.
"이 성적으로는 부모인 내가 창피해서 어디 나가겠니."
그 말은 어린 성희의 가슴을 찢었다.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부모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 그날 이후 성희는 열심히 공부했다.
피아노 앞이 아닌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뛰어놀 시간 대신 학원으로 향하며 더 높은 점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성희는 반에서 1등을 했고 기뻐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에 갔다.
하지만 부모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술은 왜 92점이야? 미술만 좀 어떻게 하면 좋겠는데."
그 한마디는 그녀의 기쁨을 송두리째 빼앗았다.
그 후 성희는 아무리 좋은 성적을 가져와도 칭찬받지 못했고
그녀의 노력은 언제나 부족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부모님이 다른 아이들을 칭찬하며 웃는 모습을 볼 때면 성희는 스스로를 탓하며 속으로 울었다.
성희가 아무리 좋은 성적을 받아도, 상을 받아도 부모님은 그저 보기만 했다.
분명 성희의 사촌이 좋은 소식을 들고 찾아왔을 때는 축하해 주던 그들이었지만
딸인 성희에게는 모진 말 밖에 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의 지옥 같은 인생은 현재진행형이었다.
고등학교 입학 후에도 성희는 부모님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다.
성적이 떨어져 절망해도 다시 일어서기 위해 스스로를 격려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런 딸의 모습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성적과 대학 입시를 이유로 그녀를 압박했다.
음악 시간에 조별 수행평가로 1등을 했을 때에는 음악에 대한 관심을 끄도록 그녀를 통제했고
교내 오케스트라 동아리에 가입했을 때에는 그녀의 성적이 조금이라도 떨어질까 걱정이 된다며
성희가 오케스트라 동아리 활동을 그만두도록 유도했다.
여전히 성희의 우수한 성적에 대해서는 절대 칭찬 한번 해주지 않았다.
자신들의 조카가 높은 성적을 받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해준 사람이 그녀의 부모였다.
정작 자신들의 딸한테는 격려 한마디라도 아끼는 그들이었다.
그런 부모님의 모습에 성희는 서러웠고 스스로가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3년을 보내며 그녀는 더 이상 피아노를 좋아하는 아이가 아닌
부모님의 칭찬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부모님으로부터 칭찬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던 성희는 열심히 공부해서 명문대에 입학했다.
명문대에 입학한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기대했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부모님은 여전히 그녀의 옷차림과 인간관계, 심지어 연애까지 간섭했다.
부모님은 성희가 어떤 친구와 어울리는지 사사건건 간섭했고
성희가 자신들이 원하는 사람과 교제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성희는 자신을 좋아해 주는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와 연애를 시작했다.
"그 남자애 주변에 예쁜 애들 많을 텐데 왜 널 만나는 거야?"
그들의 말은 성희의 자존감을 갉아먹었고 그녀는 점점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대학교 졸업 후 취업준비생이 된 성희에게 다시 한번 지옥이 시작되었다.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그녀는 부모님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서류 합격 소식을 전해도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반응뿐이었다.
"그 회사는 힘들기만 해. 더 좋은 데를 알아봐."
성희는 이번만큼은 인정받기 위해 더 노력했지만 부모님의 칭찬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나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성희는 모든 것이 버거워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듯 불어왔다.
걷다 보니 작은 정원이 나타났고 그녀는 발걸음을 멈췄다.
정원에는 푸른빛의 꽃이 잔뜩 피어 있었고 한 여자가 성희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쪽으로 가면 신발 젖어요."
그녀의 따뜻한 목소리에 성희는 움찔했다.
성희는 물웅덩이 근처로 걷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수수한 아름다움. 여자는 성희를 향해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겨울이었지만 그 여자의 옆에는 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지금 딱 하나 남았는데 학생한테 줄게요."
여자는 성희에게 모종 하나를 건넸다.
성희는 일단 받긴 했지만 겨울에 꽃을 심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이 꽃은 델피늄이라고 불러요. 한번 심어봐요. 여기다가."
성희는 낯설지만 이상하게 믿음이 가는 그녀의 말을 따라 화분을 손에 쥐었다.
여자가 준 모종삽을 받아 흙을 파기 시작했다.
"심으면서 고민거리 있으면 떠올려보세요. 학생을 괴롭힌 기억이나 감정 같은 거."
성희는 방금까지 머릿속을 채웠던 걱정거리를 떠올렸다.
그녀는 부모님의 칭찬을 받고 싶으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통제하고 간섭하려 하는 부모님한테 분노가 생겼다.
성희는 남들처럼 돈 벌면서 자신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연애도 하고 친구도 만나고 그리운 피아노도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한평생 그녀는 부모님한테 있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들이는 도구였다.
사람들은 성희의 성적과 학벌을 자랑하는 그녀의 부모님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성희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녀는 단지 부모님을 빛낼 수 있는 소유물에 불과했다.
"힘들어요. 저 진짜 열심히 살았거든요. 그런데 부모님 눈에는 그게 아니었나 봐요."
성희는 여자에게 그녀의 사정을 털어놓았다.
"점수가 오르면 칭찬받고 싶었고 인턴으로 입사할 기회가 생겼을 때 축하받고 싶었어요.
언제쯤 저를 인정해 줄 수 있을지 매일 생각해요. 다른 사람한테 해주는 칭찬 반만이라도 나한테 해주지."
성희는 서운한 마음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여자한테 위로받고 싶은 간절함이었다.
"성희 씨는 스스로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여자의 질문에 성희는 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부모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이라고만 여겨왔다.
"다른 사람 말고, 내가 생각하는 나 자신이요."
성희는 잠시 눈을 감고 떠올렸다.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순간들,
피아노로 친구들의 박수를 받았던 순간들, 대회에서 상을 타던 그 순간들을.
그 순간에 느꼈던 벅찬 느낌과 감동. 절대 잊지 못했던 기억이었다.
음악 시간에 같은 반 친구들이 성희의 피아노 실력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순간까지도.
성희는 기억을 떠올리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 벅참과 감동적인 순간이 중요한 거에요. 성희 씨 스스로에게 칭찬해 준 적은 있어요?"
성희는 부모님의 칭찬만을 갈망해 온 자신을 돌아봤다. 정작 스스로에게 잘했다는 말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럼 이거부터 해볼까요?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는 것부터 고생한 자신에게 칭찬해 주는 거.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야 돼요. 남들을 위해 살아봤자 모든 책임은 나한테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여자는 알고 있었다.
세상에 자식의 인생을 존중해 주고 그의 성공을 축하해 주는 부모님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성희 씨는 뭐 좋아해요? 꿈이 뭐에요?"
"피아노 치는 걸 좋아했어요. 지금도 그렇고. 꿈은 이제 모르겠어요."
"부모님의 인정이 성희 씨 꿈을 지우게 내버려 두지 마세요."
여자의 마지막 말에 성희는 무언가로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진정으로 내 꿈을 응원하고 성공을 축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에요."
"저는 여태껏 부모님한테 칭찬받는 그 순간만 기다려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모습이 한심하네요."
다 심은 델피늄을 바라보며 성희는 슬프지만 후련한 감정을 느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가 아닌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작에 대한 설렘.
남의 말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꼭 붙들고 있는 건 어쩌면 가장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 나로 살기 위해서 노력하면 할 수 있다.
성희는 지금이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진짜 나로 살 것이다. 하루하루 자신만의 목표를 달성하는 '나'로 살 것이다.
성희는 이제 진짜로 자신만의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전하고자 한다.
진정으로 당신의 노력과 성취를 알아줄 유일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