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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화가

잠시 쉬는 건 다시 나아가기 위한 준비다

by 수잔


25살 때부터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지 5년이 지났다.

수빈은 오늘도 맥주 한 캔과 영화만 보고 있다.

한 달 전부터 늘 함께했던 그림이 싫어졌고 그녀의 손목은 굳어버렸다.

잿빛 안개로 가득찬 듯한 머릿속은 답답하기만 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머리를 누르고 있는 느낌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영양제를 꾸준히 먹고, 카페인으로 머리를 깨어보고, 잠도 푹 자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녀의 머리는 누군가 꽉 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한때 향초를 피우고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글을 쓰던 상쾌한 아침은

이제 온갖 부정적인 생각으로 시작되었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매일 밤 잠을 뒤척였고

술이 없으면 쉽게 잠들지 못했다.

간신히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해봤지만 그녀의 굳은 손목은 그림도 그릴 수 없었다.

쉬어야겠다고 결심해도 마음이 불편했고 영화를 보면서도 그림 생각에 사로잡혔다.

매일 굳은 손목을 어루만지며 모든 것 망쳐버릴 수 있겠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렇게 수빈은 한 달을 보냈다.





어느 날, SNS에 업로드된 게시물을 확인하며 수빈은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그리고 아름다운 정원 사진을 발견했다.

'델피늄 정원'

푸른색의 꽃이 잔뜩 피어있는 정원에 한 번 가보고 싶었다.

장소를 확인한 후 그녀는 무작정 전철을 타고 정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델피늄 정원이란 곳은 공원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있었다.

수빈은 홀린 듯이 정원 안으로 향했다.

정원 안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니 델피늄이 잔뜩 피어 있었다.

꽃들 사이로 한 여자가 수빈을 기다렸다는 듯이 웃으며 보고 있었다.

델피늄같이 수수하게 아름다운 여자였다. 수빈과 비슷한 또래라고 생각될 정도로 젊어보였다.

수빈은 여자를 지나쳐 꽃들이 활짝 핀 곳으로 걸어들어갔다.

델피늄 향기를 맡으며 머리를 잠시라도 비우고 싶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렇다고 쉬는 것도 편하게 쉬지 못하는 상태인지라 그녀는 너무 괴로웠다.


"신기하죠? 겨울에 꽃들이 활짝 피어있으니까요. 저는 여기 주인이에요."

여자가 수빈에게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SNS에 있는 사진을 보고 왔어요. 혹시 저기 있는 꽃 모종은 파시는 건가요?"

수빈은 구석에 있는 모종을 보고 여자에게 물었다. 우아하면서 수수한 이 꽃을 집에 가지고 가고 싶었다.

델피늄 화분을 옆에 두면 왠지 모르게 영감이란 것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그림이 싫지만 그녀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사랑했다. 일을 계속하기 위해 그림도 사랑하고 싶었다.


"파는 건 아니고 그냥 드리는 거에요. 그런데 수빈씨한테는 모종말고 다른게 필요해 보여요."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대?'

수빈은 여자가 상당히 수상했지만 델피늄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더 관심이 갔다.

"델피늄 꽃다발 무료로 드릴게요. 화병에 꽂아서 잘 관리해 주세요.

델피늄이 시들 때가 오면 수빈씨의 고민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거에요."

왠지 여자에게 고민들을 털어놓고 싶었다.

수빈은 슬며시 한 달 동안의 고충을 꺼내보였다.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요즘 그림이 싫어졌어요.

그림을 그만두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편히 쉬는 것도 잘 안 돼요.

너무 답답하고 힘들어서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었어요.

마침 SNS를 보다보니 델피늄 정원이 있더라고요."


여자는 조용히 듣다가 수빈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쉬는 것도 일의 일부에요. 부담이 지나치면 꿈조차 짐처럼 느껴질 수 있죠.

수빈씨가 그림을 미워한다고 생각한 것도 어쩌면 부담의 무게에 짓눌려서 그런게 아닐까요?

수빈은 사람들의 호응 속에 일러스트레이터로 살아가며 매일 스스로를 압박해왔다.

책이 얼마나 팔릴지 걱정하고 자신의 그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 의식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꿈이었던 일러스트레이터가 된 후로 높은 '좋아요' 수가 그녀의 꿈이 되었다.

다른 일러스트레이터들의 그림을 보며 열등감과 좌절감이 그녀를 괴롭혔다.

항상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며 여러 작품들을 보고 배워가고자 노력했으나

이 노력은 그녀의 색깔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불안, 질투, 두려움, 자기비하, 강박은 상실감과 무기력함으로 이어졌다.

언젠가 그림을 다시 좋아하게 될것이라는 희미한 희망 속에서 한 달전부터 수빈은 슬럼프를 겪기 시작했다.




"요즘 수빈씨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자연스러운 과정의 일부에요.

그동안 열심히 노력해왔기 때문에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과정.

쉬는 건 멈추는 것만이 아니에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의욕이 모이는 시간인거지.

그러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꽃이 시들 때까지 편하게 쉬어요."


수빈은 여자가 건네준 예쁜 델피늄 꽃다발을 들고 돌아오는 길에 화병을 하나 샀다.

집에 도착해서 꽃을 꽂아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맑은 푸른빛의 델피늄.

델피늄을 바라보면 그녀의 머리는 맑아졌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여자의 말을 듣고 수빈은 그녀 자신에게 쉬는 것을 허락하게 되었다.

아무생각도 하지 않는 건 어려웠지만 쉬는 순간을 즐기려고 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잠도 푹자고, 운동도 시작했다.

때로는 영화 속 주인공의 여정을 보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서서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꽃이 시들 때 즈음, 수빈은 다시 펜을 집었다. 머릿속이 하늘색으로 물든 것처럼 상쾌했다.





자연에 사계절이 있고 겨울을 지나야 다시 봄이 오듯이

수빈의 슬럼프도 예술가로서의 여정에서 지나가야 할 과정이다.

살아가다 보면 너무 지친 나머지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있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마음 편히 쉬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잠시 쉬는 것도 필요하다.

자신을 탓하지 말고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휴식'이라는 선물을 주자.


잠시 쉬어간다는 것은 고요 속에서 앞으로 더욱 빛날 자신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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