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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 정원에서
03화
멍든 시간
과거는 미래를 어찌할 수 없다
by
수잔
Dec 30. 2024
식은 땀을 흘리며 서현이는 잠에서 깼다.
그들의 얼굴이 꿈에 나왔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박진아. 서현이와 같은 반 반장이자 학폭가해자.
진아를 비롯한 4명의 여학생들은 중학생이었던 서현을 폭행하고 돈을 갈취했다.
그것도 3년 내내.
서현도 당하고만 있고 싶지 않았다. 선생님들께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해보고
부모님께도 말씀드린적이 있었다. 같은 반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에게도 털어놨었다.
하지만 이들은 서현의 기억 속에 방관자로 남았다.
선생님들은 모범생이었던 반장 진아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진아는 선생님들한테만큼은 착하고 밝은 학생이었다.
서현의 부모님이 담임 선생님한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으나
담임 선생님은 이를 모른척하고 아무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서현을 반에서 적응하지 못한 내성적인 아이라 여기고 진아에게 서현을 부탁했다.
서현은 그 후로 진아에게 더욱 심한 괴롭힘을 당했다.
매일 밤마다 눈물로 세수를 했고
때로는 아파트 난간을 쳐다보며 이 정도 높이면 죽을 수 있을까라며
학교라는 지옥에서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내곤 했다.
진아를 비롯한 4명의 여학생들의 괴롭힘 방식은 지독하고 악랄했다.
한달에 한번 씩 서현이 부모님으로부터 용돈을 받을 때마다 그 돈을 빼앗기 위해 화장실로 불러냈고
서현이 해온 학교 숙제를 서현이 눈앞에서 찢어버리기도 했다.
서현이 조금이라도 싫다는 표현을 했을 경우 이들은 진아의 집에서 수차례 폭행을 가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서현의 친구 민선은 진아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음에도 보복이 두려워 이를 모른척했다.
민선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아도 돌아온 것은 민선의 방관이었다.
결국 서현은 선생님들을 찾아가 울면서 모든 사실을 말했고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진아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다.
서현은 믿었던 사람들 모두에게 버림받았다.
학교라는 지옥에서 3년을 버틴 후 서현은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다행히 진아와 다른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서현의 일상은 진아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 차있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도, 좋은 담임 선생님을 만나도
중학교 시절의 기억이 서현을 괴롭혔다.
서현은 그 누구도 믿지 못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진아의 폭행으로 생긴 흉터들을 볼 때마다 서현은 무너져갔다.
무력한 자신과 그녀를 도와주지 않은 사람들의 배신이 서현의 세상을 좁혀갔다.
서현의 세상을 겨우 지탱하고 있는 벽돌을 부숴버린 존재는 진아였다.
선생님들의 촉망받는 한 학급의 반장은 학교폭력 가해자였다.
서현은 학교폭력 피해자인 자신을 잊기 위해 미친듯이 공부만 했다.
사람들에 대해 마음의 벽을 세우고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게 마음의 문을 잠갔다.
마음이라도 편해질까 싶어 서현은 그들을 용서했지만
용서하려 할수록 그녀는 괴로웠다.
그렇게 또다시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중학생 시절의 모든 기억을 안고 서현은 대학생이 되었다.
5년이 지났는데도 서현은 꿈에서 진아를 만나고 있었다.
서현은 여전히 중학생이었고 진아는 여전히 서현을 괴롭히고 있었다.
잠에서 깬 후에도 서현의 몸에 있는 흉터는 그녀에게 꿈에 있었던 일들을 상기시켰고
서현의 중학생 시절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들었다.
전공 수업이 끝난 후 서현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사들고 학교 정원에 갔다.
그곳에서 한 여자가 서현의 눈에 들어왔다.
20대로 보이는 수수한 분위기의 여자였다.
'이 학교 학생인가?'
서현은 이상하게 그녀의 근처로 가고 싶어 걸음을 옮겼다.
그 여자의 근처에는 하늘색의 예쁜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서현이 제일 좋아하는 하늘빛의 색깔이었다.
수수하게 예쁜 꽃들이 여자와 많이 닮았다.
여자는 서현을 보고 있었다. 서현을 기다린 듯한 느낌이었다.
"꽃을 심고 있었어요. 학생도 심어볼래요?"
여자가 서현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학교에서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던 서현은 여자가 건넨 말에 몸이 굳었다.
처음 만난 사람이지만 그녀의 옆에서 꽃 모종을 같이 심어야 할 것 같았다.
가방과 커피는 벤치에 내려놓고 서현은 여자의 옆으로 다가갔다.
여자는 서현에게 꽃 모종을 건넸다. 방금 서현이 본 예쁜 꽃이었다.
여자는 미소를 띠며 작은 삽을 건네고 서현을 지그시 바라봤다.
서현은 말없이 흙을 퍼내기 시작했다.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그동안 서현씨를 괴롭힌 감정을 모조리 쏟아내세요.
모종을 심으면서 전부."
여자의 말에 서현은 진아 패거리의 기억을 곧바로 떠올리 수 있었다.
시도때도 없이 서현을 때리던 박진아,
당연하게 서현의 용돈을 빼앗아가던 진아와 그 일행,
도움을 요청했지만 서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던 선생님들,
서현의 손을 놓아버린 절친까지.
델피늄을 심으면서 화가 치밀었고 억울하고 속상한 감정이 서현을 감쌌다.
자신을 괴롭히는 진아한테 저항 한번 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웠던 나머지
마지막 용기를 최대한 끌어안고 주변에 도움을 구했다.
그리고 진아가 돈을 요구할 때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주변의 방관과 진아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이 모든 기억을 떠올리며 서현은 나약한 자신과 방관한 사람들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8년 동안 자신을 괴롭힌 박진아 패거리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도 쏟아냈다.
'왜 나야. 왜 하필이면 나야.'
분노의 감정 다음 슬픔이 찾아왔다. 서현은 흐느꼈다.
여자는 말없이 그녀의 곁을 지켰다.
"감정을 삭히지 말고 오늘만큼은 마음껏 쏟아내요. 욕을 해도 되고, 소리를 질러도 괜찮으니까."
꽃을 심으며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들을 흙에 꾹꾹 눌러 담았다.
델피늄을 심은 후 서현의 마음에 고요함이 찾아왔다. 마음 한켠이 시원했다.
"이 꽃은 델피늄이라고 불러요." 여자는 손으로 꽃을 톡 건들며 말했다.
"저는요. 그 날 이후로 할 수 있는 건 다했어요. 도와달라고 애원하고, 싫다고 저항하고.
그런데 달라지는게 없었어요."
서현은 허망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말했다.
"세상에는 불공평한 일들이 참 많죠. 권선징악이 있는가 싶기도 하고. 못되먹은 사람들은 잘만 사는 세상같고.
그런데 막상 두고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시간이 흐르면서 진아와 일행들이 뿌린 악행은 그들에게 부메랑처럼 돌아갔다.
서현은 진아가 거친 언행을 고치지 못한채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소식을 우연히 들었다.
대학교 입학 후에도 진아의 나쁜 버릇은
대학생이 된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사회생활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서현은 고개를 돌려 그녀의 따뜻하면서도 서늘한 표정을 바라봤다.
"나는 서현씨한테 가해자와 방관자를 용서해라 뭐... 이런말 하고 싶지 않아요.
용서하지 않아도 돼요. 용서는 선택이지 의무가
아니니까요.
대신 지금의 서현 씨를 더 사랑해주세요.”
'지금의 나?'
서현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의 서현이라는 사람은 누구일까.
고등학교 입학 후 중학생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서현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기 시작했다. 공부도 하고, 책도 읽고, 새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며
'중학생 이서현'이 아닌 '나'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수학을 잘하고 판타지 소설을 좋아하는 자신을 발견한 순간
그녀는 H대학교 경제학과 학생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서현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을 되찾고 싶었던 간절함이었다.
진아에 대한 기억이 그녀를 괴롭혀도 서현은 오늘 당장 해야 했던 과제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중학생 시절로 인해 힘들 때면 좋아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틀었다.
그렇게 서현은 5년을 버텼다.
"과거는 과거대로 흘려보내고 지금을 살아가요. 과거는 현재와 미래보다 절대 강하지 않아요."
여자는 서현의 얼굴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절대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부담주지 마세요. 마음이 편해지려면 나부터 사랑해줘야 해요."
여자의 말이 맞았다. 서현은 중학교 졸업 이후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며 나날이 발전하는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면서 예뻐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좋았고
전공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에 들어설 때의 새롭고 낯선 공기도 좋았다.
매일 새로운 일이 펼쳐질 때마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서현은 이 모든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서현은 더 이상 중학생 이서현이 아닌 자신을 사랑하고 앞으로 나아갈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델피늄을 바라보며 서현은 흐뭇했다.
후련한 마음으로 여자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여자는 아름답게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델피늄의 꽃말은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게요.'라는거 기억해요. 서현씨의 행복을 찾아가길 바랄게요."
서현은 시간표를 확인한 후 학교 건물로 향했다.
꽃말처럼 그녀는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들로 가득 찬 인생을 걸어가기로 했다.
과거는 그녀를 아프게 했지만 점점 밝아지는 그녀의 미래를 어둡게 할 수는 없었다.
멀어지는 서현의 모습을 보며 여자는 델피늄 정원의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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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 정원에서
01
델피늄 정원의 주인
02
이별의 계절
03
멍든 시간
04
작별인사
05
길 잃은 화가
델피늄 정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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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단단해진 나 자신과 새로운 시작. <잃어버린 시간의 끝에서> 시리즈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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