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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델피늄 정원에서
02화
이별의 계절
나를 사랑하는 방법
by
수잔
Dec 23. 2024
"그새 여자 생겼나 보네.
아무렇지
않은 건가?"
2
1살의 아연은 오늘도 전남친의 SNS를 보고 있다.
대학교 입학 첫날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 바로 전남친이었다.
아연에게 그는 힘이 되는 유일한 존재였고
어쩌면 20대 초반 아연의 인생에서 전부였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연의 같은 학과 선배였던 그는 새내기였던 아연에게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시간표 짜는 법부터 인기 교수님의 강의, 리포트 작성 팁까지.
대학생활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그의 존재는 아연의 전부였다.
늘 함께였고 그렇게 좋은 선배였던 그는 아연의 첫사랑이 되었다.
과엠티에서 그는 아연에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으며 고백을 했고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
아연의 심장은 벅찬 행복으로 터질 것 같았고 두 사람은 비밀 연애를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 관계가 알려지면 너만 힘들어질 거야."
아연은 알겠다는 대답만 했다. 그를 사랑했으니까.
아연은 한 학기 동안 세상에서 모든 것을 가진 사람 마냥 행복했다.
아무리 팀플이 힘들어도, 과제가 힘들어도, 시험 기간이 지긋지긋해도
이 남자를 보면 저절로 힘이 났다.
8월 말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그는 아연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했다. 갑작스럽게.
아연은 그날부터 감정을 잃어버린 로봇이 되었다.
강의실에 앉아도 팀플이 엉망이 되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이별의 슬픔을 피하려면 그저 무덤덤해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1년. 시간이 지나면서 모른척했던 감정들이 하나둘 되살아났다.
"왜 그랬을까."
그와 함께 걸었던 벚꽃 길, 나란히 앉아 듣던 전공 수업, 모든 추억이 그녀의 대학생활을 집어삼켰다.
슬픔과 후회가 밀려올 때마다 아연은 그가 보고 싶었다.
아연은 2학년이 되었고, 그가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기들과 선배들이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아연은 고통스러웠다.
그와의 모든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며 슬퍼지기 시작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1학년이었을 때 그와 이별한 날부터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던 그녀였다.
로봇처럼 살았던 아연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통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슬픔, 그리움 그리고 그 남자를 잡지 못한 후회.
이 모든 감정들이 서서히 아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집에 돌아와 고단한 몸을 쉬게 해야 할 때 아연은 울고 있었다.
방학이 되었고 아연은 본가로 향했다.
장소가 바뀌면 괜찮을 줄 알았지만 아연은 여전히 울적했다.
아연의 본가로 향하는 길 바로 옆에는 산책로가 있었고 아연은 잠시 걷기로 했다.
여름이라 더웠지만 살랑살랑 부는 바람에 기분이 나아졌다.
하지만 산책로 중간에 있는 예쁜 델피늄 꽃을 바라보며
예전에 그에게 받았던 델피늄 꽃다발이 생각나 아연은 다시 우울에 잡아먹혔다.
오늘따라 꽃이 되게 많았다.
델피늄으로 가득 찬 꽃밭을 보며 아연은 홀린 듯이 꽃밭 가장자리의 샛길로 향했다.
꽃들 사이로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아연은 여자의 근처로 걸어갔고 여자는 서서히 아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온화한 인상의 청순한 미인이었다. 아연은 여자의 예쁜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여자는 희미하게 웃었고 아연은 그 낯선 사람에게서 왠지 모를 안도감을 느꼈다.
"별로 좋은 사람도 아니었는데 왜 계속 생각하고 있어요?"
여자가 말을 건넸다.
'나한테 한 말인가? 맞네. 주변에 나밖에 없구나.'
아연은 어리둥절했다. 처음 보는 사람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을 듣고 당황했다.
산책하면서 본의 아니게 전남친 생각을 하고 있었던 아연이었다.
"빨리 잊어버려야 아연 씨 인생을 살 텐데. 맞죠?"
독심술? 아연은 이 여자가 맞는 말만 해서 마음이 따끔거렸다.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았지?"
"저는 여기 꽃밭 주인이에요. 물론 허가받았고.
이거 하나 줄 테니까 심어볼래요?"
여자가 아연한테 델피늄 모종을 내밀었다.
아연은 일단 받았지만 꺼림칙했다. 낯선 사람한테 뭐 받으면 안 좋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그래도 일단 심어 보기로 했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꽃을 심으면서 반드시 아연 씨를 힘들게 했던 '감정'을 떠올려 주세요. 꼭.
아픔을 심으면 훨씬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여자의 말을 듣자마자 아연은 여자가 준 작은 삽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연을 괴롭힌 그에 대한 모든 감정을 생각하면서 델피늄을 심기 시작했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설렘, 함께 하면서 느낀 사랑, 기쁨, 행복부터
처음 만난 그의 설렘, 함께 웃었던 행복, 사랑. 그리고 이별의 고통, 후회, 그리움까지.
삽질이 거듭될수록 그녀의 눈에서는 참아왔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이제 어떻게 버티지?'
그날의 막막함까지 떠올리며 아연은 조용히 델피늄을 심었다.
모종을 심고 한참을 울었다. 여자는 조용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아연은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그가 너무 밉고 그립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처음 보는 여자 앞에서 울어버렸을까.
델피늄을 다 심고 아연은 눈물을 닦았다. 그새 눈이 퉁퉁 부었다.
"이제 좀 나아졌나요?"
여자의 말에 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그 남자, 마냥 아연 씨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아연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연이 학교에서 그와 마주칠 때마다 그의 옆에는 나연이라는 다른 여자가 있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 생각했지만 두 사람이 매일 같이 있었다는 동기의 말을 듣고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아연이
그와 단둘이 있을 때 그는 나연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고
그와 마주칠 때마다 항상 나연이 그의 옆에 있었다.
나연에 대한 존재를 물어도 그는 친한 누나라고만 말했다.
좋아하는 감정이란 참 잔인했다. 옳고 그름 판단조차 흐리게 만들어 결국 한 사람의 마음을 짓밟는다.
아연은 나연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정말 좋아한 나머지 이런 사실을 뒷전에 놓았다. 그와 멀어지는 게 두려워 그냥 모른척했다.
하지만 아연은 혼자 생각을 곱씹었고
정말 사랑해야 할 자신을 힘들게 하고 있었다.
아연과 이별한 직후에도 학교 건물에서 보란 듯이 나연과 같이 있었다.
아연을 힘들게 만들었던
그와의 관계를 진작 끊어냈다면 덜 아팠을텐데.
아연을 힘들게 한 것은 그가 아니라 아연 자신이었다.
델피늄 모종을 건넨 여자는 아연을 본 순간부터 눈치챘다.
아연이 스스로에게 채운 족쇄를.
"이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아연 씨에게 새로운 계절이 찾아온다는 신호일 수도 있어요.
매번 찾아오는 새로운 시작이요."
여자의 마지막 말에 아연은 비로소 웃었다. 그리고 델피늄의 꽃말이 떠올랐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아연은 이제 깨달았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사람은 결국 자신 뿐이라는 걸.
"저, 또 와도 돼요?"
조심스레 묻는 아연에게 여자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여긴 아픈 사람에게만 보이는 정원이거든요. 한동안 아연 씨는 못 올 거예요."
러블리즈의 <그날의 너>를 들으며 본가로 돌아가는 길. 아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개강하면 뭐부터 할까?'
들어가고 싶은 동아리도 있고 공부하고 싶은 것도 많다.
이제 아연은 새로운 봄을 준비할 것이다. 이별의 계절은 지나갔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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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Brunch Book
델피늄 정원에서
01
델피늄 정원의 주인
02
이별의 계절
03
멍든 시간
04
작별인사
05
길 잃은 화가
델피늄 정원에서
brunch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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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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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단단해진 나 자신과 새로운 시작. <잃어버린 시간의 끝에서> 시리즈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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