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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피늄 정원의 주인

델피늄의 꽃말

by 수잔


27살 취업준비생인 나는 오늘 면접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우울함과 후련함이 뒤섞인 이 낯선 감정은 사실 익숙했다.
N번째 면접을 끝내고, 나는 지쳐가는 내 모습을 다시금 확인했다.


“합격 한번 되게 어렵네. 진짜 좀 뽑아주면 손해 보나?”
작게 내뱉은 말이 공기 중에 흩어졌다.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짜증이 목까지 차올랐다.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 이 사회가 원망스러웠다.
마음속으로 온갖 비속어를 쏟아내며 지하철에서 내렸다.


집으로 가는 길이 이렇게 멀었나 싶었다.
누군가 나를 업고 집까지 데려다 주기만 한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고 피곤하고 지친 나머지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부모님 얼굴을 마주하면 기분이 더 안 좋아질 것 같았다.
집 근처 공원에서 잠시 쉬며 음악이나 들을까 싶었다.
발길은 자연스레 공원을 향했다.

“낮술이라도 마시고 싶네.”
중얼거리며 걷다 보니 공원에 도착했다.

워낙 넓은 공원이어서 산책 코스로 인기가 좋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공원이 한적했다.
공원 안쪽 깊숙이 벤치가 보였고 나는 거기로 향했다.

오늘따라 꽃밭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하늘색 델피늄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최근에 알게 된 델피늄의 꽃말이 떠올랐다.

“나도 취직해서 금융치료라는 행복을 느껴보고 싶다.”
혼잣말이 작게 새어 나왔다.

오늘따라 공원이 이상하게 넓게 느껴졌다.

‘좀 더 걸어볼까?’
혹시라도 이상한 사람이 있을까 봐 장우산을 꼭 쥐고 발길을 안쪽으로 옮겼다.

꽃밭 가장자리에 누군가가 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젊은 여성이었다.
피할까 망설이던 찰나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면접은 잘 봤어요? 면접관이 좀 이상한 소리 했나 보네.”


낯선 말투였지만 어딘가 익숙한 느낌도 들었다.
순한 인상에 청초하고 우아한 분위기의 여성이었다. 대충 내 또래 같아 보였다.
같은 여자가 봐도 예쁘다고 느낄 정도였다.

“세상에 무례한 사람 많잖아요. 그냥 무시하고 그딴 회사 잊어버려요.”
그녀의 말에 심장이 철렁했다.
어떻게 알았지? 오늘 면접에서 무례한 말을 들은 건 사실이었다.

압박면접이라면서 면접관들은 굳이 하나밖에 없는 재수강 과목을 끄집어내며 깔깔거렸고,

지원자가 못해서 불합격한 거라며 떨어진 대학원 얘기를 끄집어내고 조롱했다.


그 순간들이 떠올라 짜증이 치밀었지만 나는 여자에게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라고 답했다.
나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그녀는 델피늄 모종을 손에 쥔 채 내게 다가왔다.
“이거 심어볼래요? 오늘 화났던 면접 생각하면서요.

여기다 심으면 돼요. 내가 이 꽃밭 주인이거든요.”
순간 어이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그녀의 제안이 끌렸다.


나는 그녀가 건넨 작은 삽으로 흙을 파기 시작했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절망, 분노, 슬픔, 두려움이 하나 둘 떠올랐다.

재수해서 명문대학교에 입학했고 학점 4점대로 졸업하며 남부러울 게 없었던 나였는데

이 모든 노력들이 오늘 면접에서 조롱거리가 되어버려 속상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꽃을 심으며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펑펑 울었다.
그녀 앞에서는 그래도 될 것 같았다.
누구라도 좋으니 오늘만큼은 내 마음을 드러내고 싶었다.

꽃을 다 심고 나니 그녀가 말했다.


"됐네, 이제. 고생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쩐지 가벼웠다.

꽃을 심으면서 떠올린 부정적인 감정들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모든 걸 쏟아낸 후의 후련함, 그리고 희미하지만 분명한 희망이 내 마음을 채웠다.

그녀는 대체 누구일까.

그리고 공원에 델피늄이 피어있었던가. 어제 분명히 팬지꽃만 본 것 같았는데.

그런데도 늘 델피늄이 피어있었던 것처럼 익숙했다.

오늘 하루가 꿈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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