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기회를 주다
오늘은 9월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다.
재수생인 재원은 긴장감을 최대한 억누르고 시험을 봤다.
또 저번과 같은 기분이다. 불길함.
시험이 끝난 후 재원은 집에 와서 가채점을 시작했다.
틀린 문제 수를 확인하자마자 재원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 진짜 어떡하지?"
재원이 재수를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 명문대 진학이었다.
내신 성적 1.9, 수상 경험 13번, 봉사 시간 20시간,
학교에서 알아주는 영어 회화 동아리의 부원이었던 재원은 법조인이 되고자 문과를 선택했다.
국어와 영어는 부족했지만 수학만큼은 자신 있었다.
부족했던 국어를 죽어라 공부해 2등급을 만들었고 영어도 간신히 1등급을 받았다.
교내 대회를 찾아다니며 상을 타고 봉사활동에 몰두하며 자신을 채웠다.
선생님들이 유독 챙겨주는 학생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어차피 나만 노력하면 되는 일이니까."
재원은 조용히 숨어 공부만 하던 학생이었다.
누구보다 완벽하길 원했고 상위권에 들어 주목받기를 바랐다.
활발하게 웃으며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던 수연을 부러워했다.
효행상, 품행상, 대회 우수상까지 싹쓸이하던 수연을 닮고 싶었다.
재원은 더 미친 듯이 노력했다. 그 애와 같은 선상에서 선생님들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이상과 달랐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했고, 완벽이라는 부담감에 짓눌려 하루종일 괴로웠다.
성적은 그녀의 바람대로 나오지 않아 스트레스가 점점 심해졌다.
억장이 무너지는 성적표를 들고 집에 갈 때면 숨이 막혔다.
저조한 성적표를 보고 한번, 내신 포기하라는 어머니의 짜증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한번,
늘 완벽해 보였던 재원을 질투하던 학생들의 비웃음을 듣고 한번.
총 3번의 절망이 그녀를 무너뜨렸다.
그렇게 재원은 3년 동안 로봇처럼 공부만 하면서 살아왔다.
그런데도 성적은 그녀의 노력을 배신했고 그녀는 결국 울다 지쳤다.
그만 살고 싶었다. 세상에 되는 일이 없다. 재원은 방에 들어가 침대에 얼굴을 파묻었다.
'처음부터 다시 살고 싶다.'
재원은 20살이 되었고 재수를 결심했다.
한 번만 더해보기로 했다. 3년 동안의 노력이 안쓰러워서라도.
하지만 재수를 해도 성적은 그녀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9월 모의고사 성적은 상상했던 것보다 처참했다. 이제 울 힘도 없다.
여태까지 공부만 했던 재원은 지쳐버렸다.
그녀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전부 잊어 저리고 싶다. 좀 자면 괜찮아 질거라 생각했다.
다음 날이 되었고, 모의고사 해설 강의를 듣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학원에 도착해서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뭔가 이상했다.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며 풀냄새가 났다.
그녀가 늘 앉던 맨 뒷줄 창가 쪽에는 어떤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여자는 턱을 괴고 창문을 보고 있다 재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학원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그 여자는 재원을 보고 빙긋 웃어 보였다. 왠지 모르게 따뜻함이 풍겨왔다.
재원이 여자가 앉아 있는 자리로 다가가려는 순간
서늘한 바람은 거세지다가 이윽고 따뜻함을 품고 다가왔다.
재원의 주변에는 꽃밭이 펼쳐져 있었고 책상과 의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음침하고 비밀스럽지만 오래된 기억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정원이었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인가 싶었다.
'나 아직 안 일어났나? 학원 지각할 텐데.'
재원은 자신이 꿈과 현실 구분이 안된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학원 강의실에 서있는 게 맞았다.
아니, 지금은 생전 처음 보는 정원이다.
고고하면서도 따스해 보이는 푸른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고 여자는 자신이 학원 직원이라 소개했다.
"아직 수업 시작 안 했어요. 시간이 좀 남았는데 모종 하나 심는 거 도와줄래요?"
여자의 말에 재원은 무의식적으로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델피늄이라는 꽃모종인데 여기 화분에 옮겨 심어주세요.
근데 심으면서 학생이 해줘야 하는 게 하나 있어요."
여자는 재원에게 작은 삽을 건네며 말했다.
"어떤 거요?"
"힘들었던 일 하나씩 천천히 떠올리면서 흙에다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거.
쉬운 거니까 해줄 수 있죠?"
여자의 말에 재원은 재수하기까지 해왔던 노력과 흘렸던 눈물을 바로 떠올렸다.
재수학원에서 모종을 심자니 힘들었던 일이 바로 생각났다.
슬픔, 분노, 답답함, 그리고 절망.
재원은 괴로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동안 했던 노력들이 한순간에 부서져 날아간 것 같았다.
허무했다.
"공부 열심히 하던데, 학생은 꿈이 뭐예요?"
여자의 물음에 재원은 말문이 막혔다.
'꿈이 뭐였더라.'
"저 일단은 명문대에 들어가서, 전공은 성적 맞춰서 가려고요. 그리고는 음..."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조차 안 하고 있었다.
불현듯 고등학교 입학했을 때의 꿈이 떠올랐다.
"법조인이 되고 싶었어요.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그냥 수능 성적 잘 받아서 높은 위치에 있는 대학 가는 거. 그게 지금 꿈이에요."
여자는 재원의 말을 가만히 듣다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꿈이요. 성적이랑 대학교 말고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요. 좋아하는 것도 포함해서."
"모르겠어요. 그런 건 나중에..."
말끝을 흐릴 때마다 재원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허망해 보이기도 했다.
"지금 당장은 높은 성적이 중요해 보일 수는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더 중요한 것을 잃어버릴 수 있어요. 그것을 우리는 꿈이라 불러요."
어제 치른 모의고사 성적이 중요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모의고사는 단순히 수능 성적을 예측하기 위한 방법일 뿐,
대학교 입학을 결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재원은 알고 있었다.
모의고사 한번 잘 치른다고 수능도 잘 치른다는 보장이 없다. 재원은 마음이 가벼워졌다.
"꿈은 다양한 모습으로 존재하죠.
나 자신을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 것,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모습."
재원은 그녀의 미래를 상상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후 그다음을, 높은 학점으로 졸업하고 나서 그다음을.
정말 모르겠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꿈을 위해 살아간다면 삶의 여정이 더 쉽게 느껴질 수 있어요."
막연하게 달리기보다 목적지를 정해 달리는 것이 어쩌면 더 쉬울 수도 있다.
여자가 재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꿈이란 건 매번 변하기도 하나요?" 재원이 물었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뀐다면, 당연히 꿈도 같이 바뀔 수 있어요.
예를 들면, 지금은 H대 대학생이 꿈이지만 3년 뒤에는 휴학내고 여행 다니는 게 꿈이 될 수 있는 거죠."
여자의 대답에 재원은 생각에 잠겼다.
"계속해서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걸까?"
꽃을 심으면서 재원은 올해의 꿈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하는 것. 우선 이것을 꿈이라 하겠다.
모의고사 하나만으로 그녀의 행복을 결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명심할 것은 행복은 나 자신에게서 찾는 거예요. 내가 행복해질 기회는 나만이 줄 수 있어요."
재원이 여자의 마지막 말을 듣자마자 정원은 강의실로 바뀌었다.
재원은 꿈에서 꺠어난 것 같았다. 머리는 맑았고 마음은 가벼웠다.
강의실에서 듣는 모의고사 해설 강의가 오늘따라 머리에 쏙쏙 박혔다.
델피늄 모종을 심으면서 여자의 말을 들은 후
재원은 잠시 생각했다.
아무리 선생님께 예쁨을 받아도, 부모님의 칭찬을 받아도, 반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도
그녀는 정말로 행복하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재원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모의고사 성적과 타인의 평가가 아니었다.
대학생이 된 후 정말 원하는 삶의 모습을 끊임없이 찾기로 했다.
그녀 자신에게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렇게 재원은 꿈을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