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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였던 마음

나만의 화분을 찾아가다

by 수잔


33살의 승환은 중소기업의 마케팅 팀 매니저다.

5년 간의 공시생 생활에 지친 끝에 취업준비를 시작했고

운이 좋게도 그해에 바로 한 중소기업에 입사했다.

신입사원이었던 그에게 첫 회사 생활은 지옥 같았다.

분명 인사 직무로 지원했으나 마케팅 팀으로 배정되었고

입사하자마자 사수였던 회사 대표의 폭언과 감정적인 태도에 적응해야 했다.

대표는 반말도 서슴지 않았고 업무 도중 승환에게 매일 전화를 걸어 그를 괴롭혔다.

대표에게 전화가 오는 날에는 그녀의 기분이 좋지 않았을 때였고

그 이유가 승환 본인 때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대표라는 자는 학연을 너무나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동기는 회사 대표의 대학교 후배였는데

회의가 열릴 때마다 동기는 참여했고 승환은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입사 3일 차에 승환은 프로젝트 진행을 맡게 되어 초과근무에 시달렸으나

그의 동기는 회의에 참여하여 내용을 기록하는 업무가 전부였다.

그렇게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 승환은 33살 직장인이 되어 있다.






'하루, 일주일, 한 달만 버티자'라고 매일 다짐하며 승환은 출근했다.

매일 속으로 퇴사를 외치면서도 퇴근 시간 이후 사수의 업무 요청에 회신했다.

입사한 지 3년 차로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는 그였지만

여전히 대표의 감정적인 태도와 과도한 업무 요청으로 스트레스가 극심했다.

길 가는 도중에 호흡곤란이 일어났고 손목은 움직일 때마다 아팠다.

회사 동료에게 하소연하고 싶어도 승환은 말을 삼켜야 했다.

워낙 퇴사율이 높았고 인원 절반이 인턴으로 운영되는지라

남아있는 직원들은 이미 상황에 적응한 사람들이었다.

회사 생활을 지속할수록 승환은 스스로가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퇴근길은 어두웠다. 어두운 하늘 아래 절망감은 커져갔다.

공시합격생을 꿈꿨던 25살의 대학생은

회사를 위해 사는 33살의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무엇을 위해 사는 걸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바로 쓰러질 수 있을 정도로 피곤하지만 편히 잠들지 못하는 그였다.

불면증에 시달리다 출근하고 피곤에 찌들어 퇴근하는 일상이 익숙했다.

몸은 점점 아파왔고 숨이 막혀왔다.


'나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 하지?'






어두운 길목 한 구석에 빛이 새어 나왔다.

승환은 괜히 그쪽으로 가보고 싶어졌다.

밝은 곳으로 걸음을 옮길수록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할 말이 많지만 들어줄 사람이 없는 이 삭막하고 컴컴한 곳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그의 작은 바람 때문에 생긴 감정 같기도 했다.

발걸음을 재촉한 끝에 도착한 곳에는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빛이 새어 나왔다고 느낀 건 이슬이 맺혀있는 파란 꽃들 때문인 것 같았다.

꽃밭을 따라 스산하고 고요한 밤길을 걸으며 도착한 곳은 승환이 살고 있는 오피스텔 옆의 공원이었다.

3년 동안 여기 근처에 살면서 파란 꽃들이 잔뜩 피어있는 정원은 본 적이 없었다.

신기한 마음에 공원 벤치에 앉아 수수하고 아름다운 꽃을 잠시 감상하고 싶었다.

맥주 한 캔 마시면서 감상하기 위해 근처 편의점에 들어갔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을 때 앉아 있던 아르바이트생이 일어나 그에게 말을 건넸다.


"공원에 피어있던 꽃은 델피늄이라고 불러요. 예쁘죠?"

여자는 단정하면서도 수수한 아름다움을 가진 사람이었다.

여기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승환이 계산을 마치고 나오자 그녀는 조용히 그를 따라 나왔다.

“지금도 피어 있는 꽃이 있고, 아직 피지 못한 꽃도 많아요.”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원의 적막을 깨웠다.

승환은 그녀의 말에 잠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회사 생각에 답답함이 밀려왔다.

내일 출근해야 한다는 생각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내일 출근하지 말고 여기서 꽃구경이나 하고 싶네요. 꽃을 보다가도 회사만 떠올리면 숨이 턱 막혀요.”

여자는 그의 지친 얼굴을 빤히 보다 말을 건넸다.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퇴사를 꿈꾸지 않아요? 숨이 막힌다니 일이 되게 많으신가 봐."

“항상 바쁘죠. 그런데 요즘은 그게 좀 다른 의미로 다가와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까지 드니까요.

그래도 도망치면 내가 무모한 건 아닐까 싶고... 그렇다고 이대로 더 다니고 싶지도 않고요.”

승환은 스스로도 놀랄 만큼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는 늘 혼자 고민을 안고 살았다.

출근길과 퇴근길, 회사에서의 긴 하루 동안도 말 한마디 건넬 사람 없이 묵묵히 버티기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누군가에게 회사 때문에 힘든 일을 말하는 것도 지쳤다.

더 이상 힘들다고 말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숙였다가 고개를 들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도망치고 싶다는 건 그만큼 많이 참고 버텨왔다는 자신의 신호일 수 있어요.

혹시 회사를 위해 살고 계신 건 아닌가요?"

예상치 못한 말에 승환은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회사에서 버틴 지 1년이 지났을 때, 그는 잘 버틴 스스로가 자랑스럽고 뿌듯했다.

2년 차가 되었을 때는 피로와 고단함이 밀려왔지만 그래도 직장인이 된 자신이 대견했다.

그러나 3년 차에 접어들면서 모든 감정은 무뎌졌다.

더 이상 자부심도, 뿌듯함도 없었다. 오직 회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하지만 퇴사를 하기에는 망설였다. 주변에서 실패한 사람으로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도망친다고 해서 비참해지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자신을 위한 용기 있는 선택이 될 수도 있죠.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까지 버티지 않길 바랄게요.”

여자는 이 말을 하며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선물이에요. 델피늄 모종이 심어져 있어요."


그녀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편의점 안으로 사라졌다.

"꽃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피는 것이 아니에요. 분갈이를 해줘야 더 잘 자라기도 하죠.

그러니까 지금 겪는 일은 인생의 살아가는 데에 한 과정일 뿐이라는 거 잊지 마세요."






승환은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델피늄을 새 화분에 옮겨 심었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잠이 들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승환은 사직서를 제출하고 회사 문을 나섰다.

회사 밖의 공기는 상쾌하고 자유로웠다.

마치 그를 짓누르던 모든 무게가 한순간에 사라진 것만 같았다.


33살. 그에게는 아직 새로운 것을 도전할 기회가 많았다.

그는 이제는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천천히 삶의 방향을 정하여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려고 한다.

빨리 피는 꽃도 있고 늦게 피는 꽃도 있다.

승환은 자신의 삶도 천천히 가꾸기로 했다.

언젠가 자신만의 꽃을 피울 날이 올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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